영화감상

[위험한 사람들-恐怖份子-Terrorizors]

ycsj 2010. 2. 11. 12:36

에드워드 양의『위험한 사람들』읽기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초상화

 

내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영화로 타이베이시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최근 타이베이에 변화가 발생한 방식과 이들 변화가 타이베이 시민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구하려 한다.(楊德昌語. 朱衛國 2003, 29에서 재인)

2007년 6월 28일 타계한 에드워드 양(Edward Yang. 楊德昌)의 영화는 타이베이(臺北. Taipei)에 집중되어 있다. 194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가족을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왔고 유학기간을 포함 미국에서 11년간 머물다가 1981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이듬해 ‘타이완 뉴웨이브(新浪潮)’를 주도하면서 홍콩, 도쿄,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유목민처럼 살다가 미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영화에서만큼은 타이베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논자들도 뉴웨이브를 함께 주도했던 허우샤오셴(侯孝賢)이 농촌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가 많은 것에 반해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도시인의 삶을 비판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뉴웨이브를 선도했으면서도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위험한 사람들(恐怖份子 Terrorizers)』을 집중 논의한 잉슝(應雄)은 허우샤오셴이 중국적이라면 에드워드 양은 서유럽적이고, 허우샤오셴이 전통`농촌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면 에드워드 양은 현대화`도시를 이성적으로 해부했으며, 카메라 기법에서 롱 테이크 미학을 추구하는 허우샤오셴의 휴머니즘에 비해 에드워드 양은 자각적 몽타주 사유를 추구하는 전위적 감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應雄 1990, 42). 국제적으로는 허우샤오셴의 지명도가 높지만 타이완 뉴웨이브를 추동한 선구자는 에드워드 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거리두기’라는 공통점은 존재한다.

대륙의 몇몇 논자들은 에드워드 양의 작품을 ‘유자(儒者)의 곤혹(困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喩群芳 2003; 楊曉林 2007). 비슷한 맥락에서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진지한 영화(誠意電影, sincerity movies)’로 간주하고 그 미학적 특징(거대한 틀, 지성적인 카메라언어, 독립제작, 비판적 리얼리즘, 정교한 예술기교)을 고찰한 쑨웨이촨(孫慰川 2004)은 에드워드 양의 핵심 모제(母題)를 다음의 세 가지로 본다. 첫째 현대 도시에 내장된 진정한 위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둘째, 현대 사회의 윤리 도덕 체계는 건전한가 아니면 취약하고 위태로운가? 셋째, 도시 속의 인간관계는 정상적인가 병태적인가? 이는 자본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 세계체계(world system) 내의 대도시가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재현된 타이베이와 타이베이인의 문제다.

‘유자의 곤혹’이라는 문제설정은『독립시대』의 영문제목(‘A Confucian Confusion’)을 징후적으로 독해한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논어․자로(子路)』1장을 인용한다. “선생께서 위에 가시매 염유가 모셨다. 선생이 말씀하시길 풍족하도다! 염유가 말하길, 풍족한 연후에 또 무엇을 더하오리까? 선생께서 답하길, 그들을 부유하게 하라.(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문답이 이어진다. “염유가 말하길, 부유한 연후에 또 무엇을 더하오리까? 선생께서 말하길, 그들을 가르쳐라.(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이 구절을 생략한 채 “2천여 년 후 타이베이는 짧은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도시로 변했다(兩千多年後, 臺北在短短20年間, 變成世界上最有錢的都市)”라는 자막을 내보낸다. 이는 수사학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하나는 감독이나 관객이 모두 두 번째 구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고 이는 2천 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다. 쑨웨이촨(2004)은 이런 전제 하에 에드워드 양 영화의 미학적 특징의 하나로 ‘유가적 교화’-비판적 리얼리즘을 꼽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자의 “가르쳐라(敎之)”는 말에 대해 ‘지금도 유효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노코멘트(No comment)!’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중간적 입장도 이미 ‘공자님 말씀’에 적극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회의에 가깝다.

에드워드 양의 문제제기는『독립시대』에서 나왔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독립시대』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말을 대신 토로하는 방식이 그 하나다.『독립시대』의 청년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마작』의 훙위(紅魚)는 “세계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매 사람이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고 그 후에야 그는 그 말에 따라 행한다”고 하고,『하나 그리고 둘』의 주인공 엔제이(NJ)는 혼수상태의 장모에게 “나 자신이 한 말이 진심인지를 잘 모르겠어요”라고 독백하며, 그 아들 양양(洋洋)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래요”라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작가가 작중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고려한다면, 이들 작중인물의 언술은 그 표층과 심층, 담론과 실천의 층위를 총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훙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해온 아버지의 가르침, ‘사람은 사기꾼과 바보로 나뉜다’라는 말을 법보로 삼아 바보의 길이 아닌 사기꾼의 길로 나간다. 그에게는 룬룬(綸綸)이 마지막에 선택한 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엔제이는 회사와 가정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혼란에 빠진다. 엔제이가 대표로 있는 회사는 기술혁신의 기로에서 정품과 짝퉁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모두들 정품 기술을 원하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이런저런 투자선도 물색해보지만 이사들은 결국 짝퉁 쪽으로 기운다. 엔제이는 이 과정에서 정품 회사와의 협상에 나서지만, 동료들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경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한 부인과 첫사랑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한다.

제3세계 대도시 타이베이를 대상으로 삼았기에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냉혹(于麗娜 2002)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도시를 해부’하고(馬軍驤 1990; 海天 1998) 비판(施立峻 2003)하고 반성(韋菁 1992; 楊曉林 2007)한다. 그 방식은 이성(蔣俊 2003)과 정관(靜觀)(孫慰川 2001) 그리고 논문식 서사(應雄 1990)다. 그리고 죽음(살인, 피살, 자살 등)을 빈번하게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본 영화 가운데『하나 그리고 둘』을 제외하곤 모두 음울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마작』의 엔딩 씬에서 룬룬이 마트를 만나 포옹하는 장면의 배경도 블루 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영화가 된『하나 그리고 둘』에 어린이의 시선을 도입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새로운 희망 찾기’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노라면 이전 영화의 주조였던 냉혹함과는 달리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엔제이의 가족들이 혼수상태인 장모/어머니/외할머니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평소 소통의 부재를 확인시켜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모/어머니/외할머니의 쾌유를 빌면서 나누는 대화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타자를 위한 행동이 자아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따뜻하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낙관주의자는 아닌 듯싶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양양의 뒤통수 사진 찍기는 교화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 다음에는? 그것은 결국 자신의 뒤통수를 본 사람의 몫이다. 이 글은 에드워드 양의 여러 텍스트 가운데 교화와 계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위험한 사람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타이베이의 ‘위험한 사람들’

 

먼저 원제『恐怖份子 Terrorizers』의 의미를 저작(詛嚼)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사전적 의미에서 ‘恐怖份子’는 테러리스트를 지칭하는데, 테러리스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우리말로 옮기면 폭력주의자 또는 폭력 혁명주의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런 맥락의 테러리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도 굳이 ‘Terrorizers’라는 영어 제목을 병기함으로써 ‘테러리스트’와 변별하고 있다. ‘to terrorize’는 ‘┅을 무서워하게 하다; 탄압[위협]하다, 위협[협박]해서 ┅시키다’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terrorizers’는 영화 맥락과 연계시키면 ‘협박하는 사람들, 위협하는 사람들’이고 조금 의역하면 ‘위험한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앞당겨 말하면 타이베이(인)를 위협하는 것은 주거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의 가스저장탱크이고, 움직이는 폭탄이랄 수 있는 혼혈소녀다. 그리고 혼혈소녀의 장난 전화를 받고 그것을 빌미로 가출함으로써 의사 남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살인/자살하게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며, 아내의 가출과 직장에서의 승진 실패로 인해 살인/자살하는 의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기록자의 역할을 하는 사진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fact)이 소설(fiction)로 나오자 “너무 무섭다!(太恐怖了!)”라고 말한다. 부잣집 아들로 군 입대를 앞두고 집을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는 자신의 일이 ‘정당한 일(正經事兒)’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여자 친구부터 사건 속의 인물까지-과 사건들을 ‘정확한 눈’으로 기록한다. 그가 직접 찍어 인화`확대한 혼혈소녀의 사진은 조금 겁먹은 듯한 그러나 무표정한 모습이다.

영화는 전지적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진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간략하게 재구성해보자. 사진사는 여자 친구와 같이 있다가 우연하게 총격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건과 도망치던 혼혈소녀를 필름에 담는다. 그로 인해 여자 친구의 집을 나와 사건 현장인 연립주택에 세 들어 산다. 어느 날 한 여성(작가)이 찾아왔고, 또 다른 어느 날 밤 혼혈소녀가 아픈 몸으로 들어온다. 작가가 장난전화 때문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혼혈소녀를 책망하지만, 그녀는 장난전화가 사진 찍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혼혈소녀에 실망한 사진사는 입영영장을 받고 여자 친구와 화해한다. 어느 날 신문에서 작가의 사진을 알아보고 여자 친구로부터 작가의 작품 이야기를 듣는다. 사진사의 여자 친구에 의해 요약된「혼인실록」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부부가 생활에서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어 부부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부인이 한 여성의 전화를 받고는 고통스러워하며 변화한다. 남편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역시 비참하게 변한다. 결국 남편은 참지 못하고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고통을 종결시킨다. 여자 친구는 심사위원의 평을 덧붙인다. ‘정상적인 생활은 아니지만, 리얼하고 소름끼치게 만든다.’ 이야기를 듣고 ‘너무 무섭다’고 느낀 사진사는 작가와 연락을 취하다가 남편인 의사와 연결되고 그에게 그동안의 사진과 사건을 보여주고 말해준다. 사진사는 여기까지 등장한다.

사진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의사는「혼인실록」을 읽은 후 혼혈소녀를 작가와 대질시켜 사건을 만회하려 한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의사의 권유를 거부한다. 같은 날 병원의 인사명령에서 승진이 제외된 의사는 처절한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경찰 팀장의 집에 나타난 의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승진했다고 말하며 축하주를 마신다. 그리고 감독은 우리에게 살인과 자살이라는 두 가지 ‘무서운’ 결말을 보여준다.

감독이 제시하는 첫 번째 결말은 이렇다. 새벽에 소파에서 일어난 의사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전날 밤과는 대조적으로 처량하기도 하고 침울하기도 하고 어쩌면 처절해보이기도 한다. 분열증(schizophrenia)의 특징이다. 어쩌면 새벽의 표정이 정상이고 전날 밤의 웃음이 비정상처럼 보이지만, 둘 다 자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병원 주임이 출근하다 피격되고 쓰러진 후의 경련 장면이 보인다. 팀장이 깨어나 옷을 입다가 총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다시 의사는 작가 애인의 아파트 벨을 누르고 의사임을 확인한 애인이 문을 닫으려 하자 애인을 쏜다. 문에서 한 방, 마루에서 한 방. 이어 침실로 들어간 의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작가 대신 거울을 쏘고는 거리로 나선다. 출근한 팀장은 두 사건을 보고 받는다. 저녁 무렵 의사는 번화가에서 혼혈소녀를 찾아 함께 호텔에 들어간다. 경찰 팀장이 부하들을 인솔해서 온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손을 씻는다. 팀장이 호텔 방문을 박찬다. 그리고 문을 박차는 소리는 총소리의 중첩되는데, 이는 의사가 혼혈소녀를 쏘는 총소리일 수도 있고 두 번째 결말인 의사의 자살 총소리이기도 하다.

두 번째 결말은 이렇다. 총소리에 이어 벽에 핏자국이 보이고 팀장이 총소리에 깨고 작가도 불길한 예감에 깬다. 의사가 자살한 장면을 팀장이 확인하고, 작가는 메스꺼움에 구토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결말을 연속적으로 보아 “전체 영화는 중산층 여성의 꿈에 불과하다”거나 “저우위펀과 관련된 그로테스크한 꿈”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잉슝은 두 장면의 연속성을 부인하면서 ‘진실과 환각의 갈마들기’를 역설하는데, 감독이 진실과 환각 사이를 오가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의사의 진실한 복수 총격은 환각이 되고 동시에 이런 환각은 진실을 은유한다. 그 결과 발생한 진실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환각일 뿐이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환각은 이미 발생한, 막 발생하고 있는, 장차 발생할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應雄 1990, 40). 작가의 구토는 이런 사실을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다.『마작』에서 샹강(香港)이 여자 친구에게 권하던 일을 자신이 당하자 구토하면서 우는 것처럼.

이처럼 후기 자본주의 시대 제3세계의 대도시 타이베이는 ‘위험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굳이 인과관계를 추적하자면, 의사의 살인/자살은 작가의 가출과 승진 실패에서 비롯되었고, 작가의 가출은 혼혈소녀의 장난전화 때문이었으며, 혼혈소녀의 장난전화와 폭력은 엄마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엄마의 허망함의 근원은 떠나간 옛 애인인데 그는 바로 미국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베이의 ‘위험한 사람들’을 양산한 것은 결국 미국의 신식민주의이고 전지구적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필연적 인과관계를 추적하기보다는 그 우연성과 개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할 수 있고, 나 또한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도시 폭력의 우연성과 익명성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는 폭력의 극단인 살인, 자살, 피살 등의 죽음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살인은 두드러진 모티프로 보인다.『타이베이 스토리』에서 아룽(阿隆)의 죽음,『구링제 소년 살인사건』에서 하니의 피살과 샤오쓰의 살인,『마작』에서 훙위가 추(邱)사장을 죽이며『하나 그리고 둘』에서도 리리의 남자 친구가 영어교사를 죽인다. 이 글의 분석 대상인『위험한 사람들』에서 두 가지 결말의 하나로 제시되는 의사의 살인도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이들 살인 사건에서 공통되는 것은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위험한 사람들의 폭력이다. 그 폭력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노지만, 그 분노의 근원은 불분명하다.

『위험한 사람들』초입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러나 서로 인지하지 못했던 혼혈소녀와 의사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폭력 관계로 바뀐다. 먼저 혼혈소녀가 의사를 파멸에 몰아넣었고 의사는 복수를 위해 혼혈소녀를 호텔로 데려간다. 이 지점에서 폭력은 양가성을 가지게 된다. 이글턴에 의하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이글턴 2007, 13)했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파괴적인 것과 죽음을 불러오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가운데 창조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가 생성되기 마련이다. 전자가 ‘테러리즘’이라면 후자는 ‘이상적 도덕주의’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전자에 저항하지만 그 방식을 배운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도덕적 이상주의는 그것이 반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괴물스런 패러디이다.”『위험한 사람들』에서 혼혈소녀가 전자를, 의사가 후자를 상징한다. 결국 의사는 자신을 파멸에 빠뜨린 혼혈소녀의 폭력을 응징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려) 한다.

아마도 감독은 후기 자본주의 시기의 대도시에서는 원인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죽음/폭력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영화 첫 장면의 총격과 쓰러진 남자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스저장탱크, 사이렌 소리, 개 짖는 소리 등 반복되는 몇 개의 기표는 우리에게 폭발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그 외에도 몇 차례 등장하는 호텔은 전지구화의 기표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어느 도시를 가도 표준화된 그러므로 익명의 호텔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곳은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에서 ‘중첩’을 많이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육교 장면’은 모르는 사람들이 마주치는 장면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연계 촬영했다. 피사자들은 상호 아무런 연계가 없지만 카메라에 찍힌 사람들은 연계를 가지게 되고, 현실은 우연에 의해 상호 위해를 가하게 될 수도 있다. 사진사의 여자 친구는 사진사가 떠나자 자살을 시도하는데, 병원에 실려 갈 때 나오는 목소리는 혼혈소녀의 장난전화의 그것이다. 또한 결말 부분에서 팀장이 호텔 방문을 박차는 소리는 의사가 자살하는 권총소리와 중첩된다. 혼혈소녀의 어머니가 추억의 팝송을 듣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딸을 어루만지는 장면의 배경음악이 흐르다가, 사진사의 여자 친구는 혼혈소녀의 사진을 보고 사진사와 다투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아마도 혼혈소녀의 어머니도 미국인 애인과 그렇게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후기 자본주의 대도시에서는 폭력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우연하게 발생하고 있다. 도시인은 이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에드워드 양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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