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동사서독(東邪西毒)]: 망각과 기다림의 서사

ycsj 2010. 2. 11. 12:16

[동사서독(東邪西毒)]: 망각과 기다림의 서사

 

고독하고 불안하며 사랑에 버림받은 현대 도시의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를 특유의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홍콩의 영화감독 웡카와이(Wong, Kar-wai, 王家衛). 그의 특이한 무협영화 「동사서독」. 그리고 중국으로 귀환되기 직전의 홍콩의 상황. 이들이 오늘의 주제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웡카와이의 작품은 그 구성이 튼실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도시 주변부 인간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으며, 홍콩의 일상을 특유의 세기말적 분위기 속에서 집요하게 추적한다.”(슈테판 크라머, ?중국영화사?) 특히 그는 귀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홍콩인다움(HongKong-ness)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충칭의 삼림(重慶森林)?에서는 두 쌍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잉글랜드 황실의 제복을 벗어던지고(식민통치의 종결) 시한이 된 통조림(잉글랜드에 의해 가공된 홍콩의 조차기간이 끝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타락한 천사(墮落天使)?에서는 파트너 교환의 문제를 통해 잉글랜드의 식민 지배로부터 중국으로 귀환되는 과정의 어려움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동사서독?은 근현대 최고 작가의 하나인 진융(金庸)의 작중인물들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신세대 감독답게 그들을 해체하여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동사와 서독은 남제(南帝), 북개(北丐), 중신통(中神通)과 함께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영웅문’ 1부)?과 ?신조협려(神雕俠侶, ‘영웅문’ 2부)?의 주요한 강호(江湖) 배경이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틀을 구성하고 있다. 웡카와이는 진융의 작품에서 결코 주인공이 아니었던 악랄한 서독과 괴팍한 성격의 동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Ashes of Time’이라는 영문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시간도 해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여전히 홍콩인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또다른 방식으로 던지고 있다.

영화는 대부분 주요 화자인 어우양펑(歐陽峯, 張國榮분)의 독백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는 훗날 서쪽 지방의 패자가 되어 서독(西毒)이라 불리고 영화에서 자신의 고용인이었던 북개(北丐) 훙치공(洪七公, 張學友분)과 결투를 벌이다 함께 죽는다.

그는 젊었을 때 ‘천하를 제패(打天下)’하려고 바쁘게 돌아다니다 실연의 상처를 입는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애인(張曼玉분)이 자신의 형과 결혼한 것이다. 결혼 전날 뒤늦게 함께 떠나자고 권유하지만 그 여인은 끝내 거부한다. 어우양펑은 이 아픔을 망각하려 스스로 사막에 유배시키고 해결사 일을 하면서 냉철하게 돈벌이에 몰두한다.-홍콩은 ‘문화의 사막’이고, 중개무역을 통해, 식민지이면서도 종주국을 능가할 정도로 경제가 발달했다.

영화에서 어우양펑의 첫 번째 고객은 무룽옌(林靑霞분)이다. 그(녀)는 대연국(大燕國)의 공주로, 망국(亡國)의 수복이라는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고 그 때문에 남장을 하고 다닌다. 무룽옌(慕容燕, 남)은 어우양펑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저버린 황약사(黃藥師, 梁家輝분)를 죽여달라 하고, 무룽옌(慕容嫣, 여)은 오빠가 자신을 황약사와 떼어놓았다고 하면서 오빠를 죽여달라고 한다. 어우양펑은 두 남매 사이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면서도 그들이 ‘상처받은 사람’임을 알아챈다. 굳이 ‘정신분석학’의 잣대를 들이대보자면, 조국 연(燕)나라를 수복하려는 무룽옌(남)이라는 초자아(superego)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무룽옌(여)의 이드(id)를 억압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홍콩의 양면성, 다시 말해 오랜 동안 기다렸으면서도 망각하고 싶은 중화제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당위와, 대(大)브리튼 제국을 따라가고 싶은 바램이 빚은 갈등의 형상이 아닐까?

또 다른 주인공 동사(東邪) 황약사는 분방한 애정 행각을 벌인다. 그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여자는 현재 다른 남자의 부인이면서 그 시동생을 그리워하고 있다. 알고 보니 황약사가 사랑하는 여인이 그리워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절친한 친구 어우양펑이었다. 그는 어우양펑을 질투하는 한편, 여인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기분을 맛보기 위해 친구(장님무사, 梁朝偉분) 부인인 타오화(桃花, 劉嘉玲분)와 사랑을 나누었고, 다른 친구 무룽옌(남)의 여동생을 희롱하여 무룽옌(여)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리만족은 진정한 욕망의 충족이 아니다(물론 욕망의 속성은 그것이 충족되어도 새로운 욕망을 욕망하는 법이다). 결국 사랑하는 여인이 죽자 그는 그녀가 어우양펑에게 보내는 취생몽사(醉生夢死)주를 마시고 모든 것을 망각하고 동쪽으로 떠난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좋아했던 복숭아꽃(桃花)만 기억에 간직한 채.

다시 한 번 무룽옌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황약사를 욕망하면서도 그 욕망을 거세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어우양펑을 황약사로 오인하고(아마도 고의로) 그와 정사를 벌인다. 그런데 황약사의 신분으로 오인된 어우양펑은 문득 자유로움을 느낀다. 자신의 연인이 그렇게 원하던 말(‘사랑해’)도 쉽게 튀어나오고, 무룽옌을 자신의 연인으로 환상하면서 욕망을 추구한다. 2인이 벌이는 4인의 정사! 어우양펑의 몸을 빌어 황약사와 사랑을 나누는 무룽옌, 그 무룽옌의 손을 형수의 애무로 받아들이는 어우양펑, 궁금한 것은 이 둘 사이의 감정이다. 그들은 진정 서로를 대용물로만 생각했을까?

시간의 선후는 있지만 똑같이 취생몽사주를 마셨으면서도 동사와 서독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모두 망각한 채 동쪽의 도화도(桃花島)로 은거하는 황약사, 그리고 기억 속에서 줄곧 기다려왔던 환상을 간직한 채 서쪽의 백타산(白陀山)으로 패자가 되는 어우양펑. 여기에서 동과 서의 공간은 교체되고 그럼으로써 해체된다. 황약사를 흉노족이나 칭기즈칸의 몽고족에게 입었던 상처(동쪽의 桃花)만을 기억하고 있는 대영제국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