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Chinese Box]: ‘변함 없기’를 바람과 ‘희망 없는’ 변화

ycsj 2010. 2. 11. 12:10

[Chinese Box]: ‘변함 없기’를 바람과 ‘희망 없는’ 변화

 

 

홍콩 출신이면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웨인 왕(Wayne Wang, 1949년생) 감독. 그는 자신의 출신 때문인지 중국계 미국인의 삶을 주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에이미 탄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조이럭 클럽 The Joy Luck Club」(1993)은 미국에 이주한 네 중국인 여성의 마작 모임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 그들의 이민 및 정착 과정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어머니 세대와 딸 세대의 차이를 부각시키되 궁극적으로 서로 이해하게 된다는 감상주의적 결말로 이끌었다. 그의 최근작 「The Center of the World」(2001)는 금전에 의해 의사소통 및 정감 소통의 경로까지 차단당한 현대인의 문제를 다루었고 등급 문제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웨인 왕의 다른 작품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차이니즈 박스」는 1997년 7월 1일 귀환 직전 약 6개월간의 홍콩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제작년도가 1997년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생생한 현장감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오리아나호의 출항, 덩샤오핑(鄧小平)의 죽음, 학생의 분신 자살, 웨일즈 경비대의 철수 등의 TV 중계 장면과 디지털 카메라로 잡은 흔들거리는 홍콩의 풍경은 ‘극영화 속의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우리를 식민시대의 오욕의 현장이자 일상적인 자본주의적 삶의 터전인 홍콩으로 안내하고 있다.

감독은 홍콩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존 스펜서(Jeremy Irons분)의 일과 사랑을 통해 홍콩의 심층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도 흔들거리는, 그래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존의 디지털 카메라의 렌즈를 따라 가보자.

존은 15년간 홍콩에 거주하고 있는 영국인 주재기자다. 그는 홍콩에 관한 저서도 펴낼 만큼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홍콩 전문가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홍콩을 ‘성실한 창녀’로 비유했다. 이는 홍콩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익을 잉글랜드가 향유하고 있는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마치 주인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물어뜯는 연습을 하는 투견처럼. 그러므로 그는 홍콩의 중국 귀환은 포주가 바뀌는 것일 뿐, 다른 것은 ‘변함없기’를 바란다.

존의 바람은 홍콩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서양 기업인들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은 홍콩을 ‘대형백화점’, ‘돈 제조기’, ‘대형 카지노’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천국인 홍콩의 경영진이 바뀌어도 그 메커니즘이 유효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홍콩 기업인들도 공유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한술 더 떠서 기존의 ‘홍콩-잉글랜드’의 합작선을 ‘홍콩-잉글랜드-중국’으로 확대하고, 나아가 대브리튼제국과 대중화제국의 합작으로까지 확장하여 자본주의의 지구화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홍콩의 중국 귀환을 7개월 앞둔 1996년 12월 31일, 존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홍콩 클럽의 송년회에서 학생 운동가 윌리엄 웡이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것은 귀환 후 개인적․문화적 자유가 상실될 것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존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동안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홍콩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는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홍콩 제대로 이해하기’의 일환으로 귀환 전의 홍콩의 다양한 일상을 친구와 함께 비디오에 담게 된다. 그 과정에서 특이한 복장과 행동의 진(張曼玉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인터뷰한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홍콩 반환 후의 모습이라든가 자유 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특이한 인생 역정이 식민지 홍콩의 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은 부모를 따라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주했다. 어려서 아버지한테 겁탈당한 후 창녀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얼굴의 상처 때문에 그나마도 여의치 않다. 그녀에게는 또 다른 아픈 상처가 있다. 바로 학창시절 사랑하던 영국인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이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고 연애편지를 넣어두던 비밀 편지함도 공유했었다. 그러나 남자친구 아버지의 회사는 직원 및 그 가족들이 홍콩-중국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결국 남자친구는 전학을 갔고 그녀는 남자친구의 명의로 된,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쓴 절교 편지를 받게 되었다. 진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기도했다. 현재 그녀는 거리에서 모조 명품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존은 진을 통해 홍콩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간다. 홍콩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수록 비비안에 대한 사랑도 깊어만 간다. 비비안(鞏俐분) 역시 대륙 출신의 홍콩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 대륙에 남아있고 딸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만을 소망하고 있다. 비비안은 그 꿈을 마이클과 실현하고자 한다. 동거 초 호스티스 노릇을 한 비비안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마이클은, 비비안을 마담으로 내세워 술집을 경영하면서 중국과의 합작에도 참가하고 있는 주목받는 홍콩 경영인이다. 그는 비비안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만 청혼하지는 않는다. 동반자 관계를 원하는 비비안은 그러므로 그에게 거부당한다. 중국은 홍콩을 ‘동방의 진주’라고 추켜세우지만 홍콩을 진정한 동반자로 인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1국 2체제’라는 전대미문의 해법으로 홍콩 귀환의 기본 틀(box)을 마련한 덩샤오핑이었지만, 두 체제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까지 설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원하는 존을 선택하는 비비안은 홍콩에 대한 제3의 해법, 즉 홍콩의 자주적 독립으로 읽을 수도 있다.

진과 비비안의 홍콩에 내일은 없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진, 존이 떠난 후의 비비안, 그들에게 홍콩은 그저 삶의 현장일 뿐이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생계를 위한 시련이 남아있다. 그것은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았으면서도 그에 귀속될 수 없었던 과거의 홍콩과 중국으로 귀환하면서도 특별 행정구로 남는 미래의 홍콩, 그리고 그 변화 과정에서 별다른 기대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홍콩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