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2』

ycsj 2010. 1. 2. 21:32

 

 

동아시아의 냉전문화와 문화냉전: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2』를 읽고

 

 

한국 사회에서 동아시아담론이 ‘주류화되었다’거나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과잉되었다’라는 평가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는 여전히 모호하다. 근현대(modern) 이전 동아시아에는 타자를 상정할 만큼의 ‘우리 의식(we-ness)’이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동아시아(인)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서유럽에 의해 무력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동아시아가 그것을 내면화(internalization)했다. 전자가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라면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 또는 셀프 오리엔탈리즘(self-Orientalism)이라 할 수 있다. 후자에 대해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는 “몇 세대에 걸친 지식인, 학자, 정치가, 평론가, 작가라는 오리엔탈리즘에 꿰뚫린 사람들이 반복 재생산한 표상=대리 표출(representation)에 의해 구성된 현상”(고모리 요이치, 『포스트콜로니얼-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 송태욱 옮김, 삼인, 2002, 서울, 12쪽)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에 바바(Bhabha, Homi)의 양가성 이론에서 식민자의 시선(look)과 피식민자의 응시(gaze)를 결합시키고 세계체계(world system)의 시야(perspective)를 가지고 동아시아와 서유럽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거칠게나마 아래와 같은 단계를 설정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서유럽에 의한 동아시아 구성이다.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서유럽 제국주의의 침략은 동아시아의 근간을 흔든 ‘서양의 충격’이었다. 서유럽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야만’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문명’화(化)시키려 했다. 사실 서유럽이라는 개념 또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귀퉁이라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 등 ‘그 외의 사회’를 타자화(othernization)하는 과정에서 발명되었고(invented), ‘그 외의 사회’에 강요되었으며, ‘그 외의 사회 사람들’은 그것을 내면화했고 열심히 추종해왔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동아시아에 의한 서유럽 수용과 상상이다. 이는 주로 일본의 서유럽 모방으로 대표되었다. 전통적으로 중국 중심의 조공외교 체계에 편입되어 있던 일본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 제국의 몰락 징후를 간파하고 만국공법 중심의 서유럽 외교체계에 자발적으로 진입한 것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중국을 타자화시키는 동시에 아이누인을 내부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이어서 류큐와 타이완 그리고 조선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자신과 동아시아의 다른 ‘야만’ 국가들과의 차별화를 도모했고 서유럽과 비슷한 수준의 ‘문명’ 국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을 모방했다.

셋째 단계는 동아시아에 의한 서유럽 응시(gaze)다. 이는 식민자의 시선(look)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1919년 조선 반도의 3`1운동이나 중국 대륙의 5`4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현실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해당 지역에서 진정한 근현대의 시작을 표지하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루카와 데쓰시(丸川哲史)에 의하면,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지배했으며, 그 반대편에서는 반(半)식민지 상태의 아시아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흥성했는데, 일본은 1919년의 파동을 그대로 비켜감으로써 일본의 ‘아시아’ 담론구조가 1919년을 놓쳐 버린 채 성립되었다.(마루카와 데쓰시, 『리저널리즘』, 백지운`윤여일 옮김, 그린비, 2008, 서울, 59쪽)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에 의한 동아시아 상상이다. 근현대 이래 동아시아가 서유럽에 의해 상상되고(imagined), 발명되고(invented), 구성되고(consisted), 조직되었(organized)던 것이라면, 이제는 동아시아 스스로 주체적으로 상상하고 발명하고 구성하고 조직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다. 우리는 동아시아(인) 정체성을 서유럽에 의해 구성된 것을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재창안(reinvention)의 차원에서 새롭게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존의 서유럽적 상상과 구성에 저항하면서 동아시아(인)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및 내셔널리즘과 함께 냉전은 동아시아 근현대를 고찰하는 관건적 고리임에 틀림없다. 『냉전과 대학』의 엮은이인 앙드레 시프린(A. Schiffrin)은 냉전을 이렇게 평가한다. “역사가들은 20세기 후반기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냉전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냉전은 우리의 정치를 지배했고 우리의 경제를 변형시켰고 또 무수한 방식으로 전세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냉전은 역사의 사유방식에서부터 다른 나라들 문화 및 사회의 접근방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요한 영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냉전이 지식인의 삶에 끼친 영향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연구는 하나도 없었다.”(앙드레 시프린,「엮은이의 말」, 촘스키, 노엄 외(2001), 정연복 옮김, 『냉전과 대학-냉전의 서막과 미국의 지식인들』, 당대, 서울, 7쪽) 여기에서 ‘우리’는 주로 미국인을 가리키지만 시프린의 이 언급은 동아시아에 적용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쑨거(孫歌) 또한 ‘냉전구조 속의 동아시아 시각’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동아시아 시각에는 냉전의 형성과 해체가 동아시아에 가져다준 국제적 변동이라는 역사적 시야가 빠져 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 핵문제에 대한 태도이다. 그가 볼 때 동아시아담론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북한의 핵문제가 단지 일회적인 국제정치문제로서 다루어질 뿐, 동아시아라는 틀과 연계되어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쑨거, 김월회 옮김, 「동아시아 시각의 인식론적 의의」, 『아세아연구』제52권 1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9, 서울, 42쪽) 그러므로 그는 한중일 공히 ‘냉전구조 속의 동아시아 시각’을 가질 것을 주장한다. 냉전구조가 사실상 해체된 상황에서조차 냉전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독립된 채로 불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갈수록 단순화되고 경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1: 1940-1950년대』(이하 『풍경 1』)에 이어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2: 1960-1970년대』(이하 『풍경 2』)가 출간되었다. 공동연구자의 하나인 이동연은 『풍경 1』과 『풍경 2』의 성과를 ‘동아시아의 문화지역주의와 냉전문화’로 요약하면서 “동시대 동아시아를 하나의 탈냉전 시대의 문화권역으로 설정하면서 배타적인 문화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문화소통과 탈국민-국가적 횡단을 기획하고자 한다”(이동연, 「동아시아 담론형성의 갈래들-비판적 검토」, 『문화과학』52호, 문화과학사, 2007, 서울, 112쪽. 이하 이 글 인용은 본문에서 쪽수만 표시함. 이동연은 주로 2006년 4월과 2007년 4월에 개최된 국제심포지움에서 발표된 글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풍경 1』과 『풍경 2』에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연구책임자인 백원담의 동아시아론을 “한`중`일 국민-국가의 패권적 지역주의가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이해관계를 결집시키고 동아시아 내 다양한 저항의 경험들을 서로 공유하는 대안적 지역주의 구성”으로 파악하면서, 『풍경 1』과 『풍경 2』의 연구들이 “동아시아의 문화적 근대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 냉전문화를 주목”(113)함으로써 “동아시아 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형성에 대한 재고찰과 1950년대에서 1970년대 동안 동아시아 냉전문화와 국민문화의 형성에 대한 연구들은 탈냉전 시대의 문화적 지역화나 문화적 아시아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113)고 평했다. 나아가 이런 시도가 “동아시아 문화연구의 공시성과 통시성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접점을 마련”(115)했고 “특정한 지역과 분과주제에 매몰되어 있는 전통적인 지역학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이지만, “냉전문화와 국민문화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연구성과들이 앞서 언급한 대안적 문화지역화라는 실천적인 상상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공통의 문제의식은 부족해 보인다”(115-6)라는 지적도 함께 하고 있다.

『풍경 2』는 『풍경 1』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백원담은 서문격인 「글문을 열며」에서 개인의 미시사를 통해 냉전의 경험과 냉전연구의 역사적 해후가 갖는 문화적 의미망을 서술하면서 한반도와 아시아의 근현대에서 오리엔탈리즘과 더불어 냉전이 관건적 고리임을 전제하고 있다. 백원담에 따르면, 『풍경 2』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의 ‘국민문화’ 형성을 ‘냉전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연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냉전문화’ 연구에 ‘인터아시아적 시각’을 확보할 때 역내 문화 간의 모방`전파`변용`대치라는 다각적 차원에서의 교차적`입체적 연구가 가능하며 비로소 동아시아 ‘국민문화’의 형성에 관한 구체적`심층적 연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백원담, 「글문을 열며」,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엮음,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2: 1960-1970년대』, 현실문화연구, 2009, 서울, 15-6쪽. 이하 『풍경 2』의 인용은 본문에서 쪽수만 표시함) 동아시아 국민문화 형성에 끼친 냉전문화의 광범한 영향에 주목하면서 인터아시아적 시각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전자와 관련해, 백원담은 『풍경 1』에서 식민체제와 냉전체제를 연속/이중구조로 파악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아시아에서 민족해방운동과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관철된 문화냉전, 이데올로기적 대치와 제도적 장치의 구축, 일상적`심미적 과정에서 내재화된 냉전성은 아메리카나이제이션(Americanization)과 소비에타나이제이션의 단선적 대립과 각축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시아 내셔널리즘이라는 바탕 위에서 그 각기의 사상문화적 변주를 통해 일종의 정체성 정치를 구현해 왔다는 것이다.”(강조-인용자)(백원담, 「냉전기 아시아에서 아시아주의의 형성과 재편 1」,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편,『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1: 1940-1950년대』, 현실문화, 2008, 서울, 55쪽) 2차대전 종결 후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이 부응한 냉전구도가 단순하게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화와 사회주의 진영의 소비에트화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내셔널리즘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백원담은 이런 관점을 다듬어 냉전을 “과거 식민종주국과 식민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막론하고 각 국민국가의 틀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인의 의식적`일상적 차원을 규정짓는 문화논리”(강조-인용자)의 차원으로 승격시킨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식민지시대 거대한 지역체제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라는 대척구도를 기반으로 각각의 국민국가로 분절되는 과정에 은장된 ‘공통분모’라 할 수 있”(15)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전문화는 탈냉전의 시대에도 문화냉전의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동아시아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초자료가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자료의 착위(錯位)문제로 인해 아시아의 역사가 아시아에 의해 제대로 쓰여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세계와 아시아에서 모두 쉽게 확인되는 학문의 역사적 비대칭성으로 인해 그 주체 설정이 아직도 어렵다는 점(13-4)을 감안하면서 『풍경 2』는 “냉전문화를 동아시아에서 국민화의 제도적 장치이자 내재화`일상화 원리”로 간주한다. 이를 위해 거시적 관점에서 식민체제로부터 냉전체제로 연속/전환되는 과정에서 아시아 각국이 ‘국민문화’를 형성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 대해 분석하고, 미시적 관점에서 ‘냉전’이 의식적`심미적`일상적`문화적 차원에서 국민화된 사람들에게 내재화되는 과정을 분석하며, 역내 문화교통과 관련해 각국의 ‘냉전-국민’ 문화가 서로 모방`전파`대치`교차되는 양상을 문제 삼는다.(14)

두 번째 전제인 ‘인터아시아적 관점’은 천광싱(陳光興), 왕샤오밍(王曉明) 등 지역 내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학자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통해 획득한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연구 초기의 문제인식(“자유진영의 경우 식민체제-냉전체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미국문화에 대한 동경과 모방이 국민문화 형성 원리로 작동했다고 한다면, 중국이나 북한`베트남과 같은 공산진영에서는 식민체제나 미국화를 적대시하는 형태로 국민문화가 형성된다는 것”(17))을 극복하면서 “아시아정체성과 주체형성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17)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아시아적 관점은 인터아시아 네트워크 형성으로 이어져, 동아시아 지역 내 학자들의 글을 수합해 실은 것도 망외의 성과다. 『풍경 1』에서 뤄융성(로윙샹), 미치바 치카노부, 렁유, 도야 마모루, 허둥훙의 글을 실은 것에 이어 『풍경 2』에서도 미치바 지카노부, 로윙샹(뤄융성), 조엘 데이비드, 커위펀, 뷔리야 사왕초트의 글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풍경 2』는 4부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마간산격으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냉전풍경1: 운동하는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의 다중>에서 백원담은 「아시아에서 1960-70년대 비동맹/제3세계운동과 민족·민중 개념의 창신」에서 아시아 내셔널리즘이라는 관점을 통해 ‘비동맹운동(non alignment movement)’과 ‘제3세계운동(third world movement)’을 전후 아시아 지역정체성이 구성되는 과정, 즉 ‘아시아에 의한 아시아’ 구성과정(27)으로 이해하면서, 아시아에서 발아된 비동맹운동으로부터 제3세계운동으로 전화되는 과정의 중요 회의 및 결의문을 통해 아시아에서 연대운동의 대두 원인과 발전적 전개의 부면들을 포착하고자 했다(95). 박경태는 「‘화교’에서 ‘화인’으로: 냉전시기 인도네시아 화인들의 정체성 변화」에서 인도네시아의 민족 만들기(nation-building)와 화인 정체성의 변화(143)에 초점을 맞추어, 인도네시아 중국 ‘화교’가 ‘화인’이 되어간 과정을 ‘냉전 논리’와 연계시켜 분석했다.

<냉전풍경2: 국민국가의 문화 구상, 그 제도와 재현의 임계>에서, 로윙상은 「변동하는 중국의 문화민족주의: 홍콩 문화냉전의 충격들」에서 냉전기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재배치 과정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을 통해 포스트식민시대 홍콩의 문화지정학을 분석했다. 특히 미국이 홍콩의 좌익 흐름을 견제하기 위해 홍콩 내 중국 난민들에게 지원금을 주면서 ‘달러문화(greenback culture)’를 만들고 CIA와 연관되어 있던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이 주요 출판사들에 자금을 지원(207)했으며, 이를 통해 신유학 등의 문화민족주의가 부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윤영도는 「냉전기 국민화 프로젝트와 ‘전통문화’ 담론: 한국·타이완의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1960-70년대 ‘전통문화’ 담론들을 냉전과 국민화 프로젝트라는 이중과제에 대한 대응 산물로 파악했다. 박자영은「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인민의 표상: 1970년대 리영희의 중국 논의를 중심으로」에서 리영희의 중국 논의가 냉전체제의 논리와 문화가 일국 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포착함으로써 냉전체제에 대한 전복적 사고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했다.

<냉전풍경3: 미디어 장(場)의 구성과 작용>에서 염찬희는「1960년대 한국영화 다시 읽기: 반공과 발전 논리를 중심으로」에서 한국영화를 근대화하려는 영화인들의 욕구와 빈곤 상황의 일반 대중의 근대화 욕망을 전유한 박정희 정권이, 영화사 허가, 검열, 수상제도 등을 통해 생산 주체 및 영화의 내용을 관리했을 뿐 아니라 ‘애국가-대한뉴스-문화영화-본영화’를 조합시킨 특수한 수용상황을 만들어 일반 대중을 근대적인 ‘한국민’으로 구성하고자 했고, 영화 속에서 근대화 논리가 친미, 발전, 반공 논리와 결합했음을 밝혔다. 이종님은 「1960-7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한 ‘공공’이데올로기 형성에 관한 연구: 한국·일본을 중심으로」에서 계몽의 도구로 활용된 텔레비전 드라마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규범, 인간관계, 다양한 문화를 전파시키면서 현실사회에 순응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냉전풍경4: 일상 대중문화의 역학과 욕망학>에서 김예림은「1960년대 중후반 개발 내셔널리즘과 중산층 가정 판타지의 문화정치학」에서 중산층 가정 모델에 내포된 개발국가의 현실과 욕망의 거리를 드러내고 196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에 나타난 변화의 배후에 냉전 시스템과 반공적 군사주의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음을 논했고, 신현준과 뷔리야 사왕초트는 「음악적 공공 공간과 ‘순수/퇴폐’의 문화정치(학): 1970년대 냉전기 한국과 태국에서 청년문화의 출현과 종언」에서 대중음악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양국의 청년문화를 조명했다. 이들은 서양(미국)의 대중음악이 다양한 계층에 어떠한 차별적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고 태국의 ‘삶을 위한 노래’와 한국의 ‘포크송’이 학생운동의 좌파정치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등에 대해 분석했다. 한편 이동연은「주변부 스포츠 이벤트의 탄생과 국가나르시시즘: 1970년대 아시아 국제축구대회의 근대표상」에서 ‘아시아적 발전 모델’의 상징적 분출구라 할 수 있는 ‘아시아 국제축구대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냉전시대 스포츠를 매개로 삼아 그 표상의 장소를 획득한 국가 나르시시즘의 문화정치학을 비판적으로 재고했다. 특히 월드컵이 최대 화제가 되고 있는 지구촌 시대에 돌아볼 때, 메르데카컵, 킹스컵, 박스컵 등의 아시아 축구 이벤트들이 “아시아를 매개로 한 세계화에 대한 (국가 나르시시즘의) 욕망”(495)이었을 수도 있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들 각론이 전체 주제와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또한 각론 사이에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평가는 보다 꼼꼼한 독서를 필요로 한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풍경 1』에서와 마찬가지로 『풍경 2』에서도 ‘아시아’는 동아시아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원담의 글을 제외하면, 거개가 한`중(타이완과 홍콩 포함)`일의 협의의 동아시아에 집중되어 있고 동남아시아에 관한 몇 편의 글을 합해도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 연구도 14편 가운데 3편에 불과하고 아세안(ASEAN) 10개국 가운데 인도네시아 화인, 필리핀 영화정책, 태국의 청년문화를 다룸으로써 지역적 불균등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 충실하느냐,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포함시키느냐, 아니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까지 포함한 명실상부한 아시아로 나아가느냐는 제목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은, 동아시아연구소의 향후 발전 방향과 연계된 문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