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연구의 ‘당대성’을 징후적으로 읽기
: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임춘성․왕샤오밍 엮음, 현실문화연구, 2009)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 ‘문화연구’의 새로운 참고체계
몇 년 전 모 대학교 대학원 수업 첫 시간에 수업에 필요한 참고문헌을 소개하면서 문화연구에 필요한 기초이론서이니 학기 중에 꼭 읽거나 참고 바란다는 당부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소개한 실라버스는 대게 비판적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저서들이었다. 맑스, 루이 알튀세르, 안토니오 그람시, 레이먼드 윌리암즈, 발터 벤야민, 미셀 푸코,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의 저작 등 문화연구자들에게는 오래 동안 인용되었던, 내가 생각하기에는 필독서라고 판단했던 것들이다. 문화연구를 전공하는 석사 생들이나 박사과정 생들에게는 한번쯤은 읽었을 법한 책들이기도 했다. 특히 그 학기에는 한주에 텍스트를 한 사람씩 맡아서 발제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사전에 모두 함께 읽고 쟁점을 토론하는 방식의 수업으로 전환하는 게 좋겠다 싶어 사전 공지를 통해 수업의 진행방식을 알렸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관련 저서들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도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학생들이 관련 책을 거의 접한 경험이 없거나 읽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텍스트를 읽어 오지 않는 학생들에게 약간의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문화연구를 공부하던 시절과 지금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절이 서로 다른 참고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학생들은 내가 당연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책들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맑스와 알튀세르와 푸코를 문화연구 수업에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나와 학생들 사이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안 된 것이다. 이른바 문화연구의 필독서, 메타이론에 대한 중요성과 무관하게 학생들은 굳이 이러한 책들을 두루 읽어야 할 필요성을 과연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으며, 메타이론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도 자신이 관심 있는 연구 과제를 충분히 수행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화연구의 메타이론과 참고체계의 자명성에 대한 의문들은 이론적 바탕 없이 실증적인 연구에 매몰된 동시대 문화연구의 풍토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게 해주었다. 현재 문화연구를 하고 있는 많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참고체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연구의 서구중심적인 참고체계로부터의 탈주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문화연구 수업 시간에 제출하는 참고문헌들은 거의 모두가 미국과 유럽의 이론가들의 책들로 구성되어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문화연구가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론적 토대들이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문화연구를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앞서 언급했던 이론가들의 텍스트들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문화연구가 1990년대 이후 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적 실천으로 등장하면서 아시아 내 문화현실과 문화환경에 대한 국지적, 권역적인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서구 이론가들의 저서 못지않게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저서가 중요한 텍스트로 번역되고 문화연구 수업시간에 참고문헌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일본,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등 아시아 각국의 문화연구자들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도 활발해지고, 상시적인 콘퍼런스를 통해서 아시아 문화현실의 공통된 문제들에 대한 공동연구도 활발해졌으며, 각국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들의 글과 저서들이 번역되어 상호 참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한다.
아시아 문화연구의 통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제 더 이상 서구의 문화연구 참고체제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만큼,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물도 2차적 문헌에 불과하다는 생각 역시 어리석어 보인다. 최근 한국에서 개최된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자들 간의 워크숍에서 대만의 문화연구자인 첸광신(陳光興)이 문화연구의 서구 중심적 참고체계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역시 이러한 맥락을 강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연구 참고체제에 대한 ‘탈식민적 시도’는 문화연구의 국지적 실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연구』(임춘성․왕샤오밍 엮음, 현실문화연구)는 이러한 문화연구의 인터-아시아적 참고체계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한 텍스트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목포대학교 임춘성 교수와 상해대학교 왕샤오밍 교수가 공동으로 편집책임을 맡고,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10명의 문화연구자와 북경을 대표하는 문화연구자 다이진화 북경대 교수의 글들을 묶어서 나온 중국 문화연구 관련 최초의 책이다. 기존에 다이진화, 첸광신 등 중국어권 문화연구자들의 단행본이 출간되었고, 동아시아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저서들을 통해 중국 문화연구자들이 소개되긴 했지만, 중국문화연구의 독립된 주제로 대표적인 문화연구자들의 글을 단행본으로 만나게 된 것이 이 책이 처음이다.
2. 포스트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중국 지식인의 딜레마
이 책은 주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의 글들을 중심으로 묶인 책이긴 하지만, 상해 지역 연구자들이 중국 문화연구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 중국의 문화연구의 이론적 현황과 현실 쟁점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물론 이 책이 중국 문화연구의 모든 흐름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또한 문화연구의 국지적 실천성을 고려해보면 현재 중국에서 가장 자본주의적 문화의 강도가 높은 상해를 연고로 하는 문화연구자들의 글들은 중국의 당대문화의 최전선을 읽어 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갖게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중국의 문화연구자들이 당대 중국문화현실을 바라보는 에피스테메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아래의 인용문이 그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단서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현실을 낙관했던 중국 지식계의 판단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던 것 같다. ‘봉건 전제’의 역사는 이미 전복되었고, 중국은 보수에서 개방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나아가고 있다. 특별하고 유장했던 역사의 관성이 남아있지만, 이것이 인류 진보의 보편적인 규율을 거역할 수 없다. 설령 이 흐름을 거스르고 싶은 사람이 존재한다하더라도, 센다이화의 추세는 결국 막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결국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 자동차와 마천루의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아마도 『남방도시보』와 같은 샤오바오의 노력은 분명히 환영해야 할 것이다. 이 신문들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사회의 일각을 들춰내고, 거리에 뭔가 화젯거리를 만들어놓아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온통 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샤오바오가 이면에 감추고 있는 비밀스러운 서사를 읽어내게 될 때, 그리고 대중매체와 소비이데올로기의 공모를 목격하게 될 때, 그것들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행하는 것이 기존 이데올로기의 권력과 차이가 없음을 알아차렸을 때, 우리가 그것을 ‘공공의 도구’라고 인식하고 환영할 수 있을 것인가?
위 두 인용문은 당대 중국 문화 현실의 딜레마를 문화연구자들이 어떻게 고민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개혁개방 바람으로 중국은 ‘센다이화’(현대화)의 기류로 흘러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현대화의 추진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그로 인해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는 도시 공간의 시각성과 도시 주체들의 계급분화가 야기하는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의 모순을 방치할 수 없는 현실이 현재 중국 문화연구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다. 과거 봉건사회로 회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현대화를 위해 무작정 앞으로 내달릴 수만 없는 비판적 성찰이 요구되고, 개인의 욕망을 인민주의로 환원할 수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그 욕망이 소비 자본주의로 흡수되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는 현실이 현재 중국 문화연구자들이 공통으로 고민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중국의 현대화로 인한 문화현실의 딜레마를 왕샤오밍은 부상하는 신부유층이 생산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다이진화는 문화영웅의 서사“로, 레이치리는 ”샤오바오“에서 감지할 수 있는 ”개인의 발견“으로 표현한다. 왕샤오밍은 중국이 시장 경제개혁을 거치면서 기존의 계층에서 네 가지 새로운 계층이 새로 등장했다고 파악한다. ”수천만 혹은 그 이상의 개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신부유층’, 깨끗하나 좁은 표준화된 사무실에서 힘들게 일하는 화이트칼라, ‘면직(下崗)’, ‘휴직’, ‘퇴직 대기’ 등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실직 노동자, 그리고 대부분 상하이의 비기술적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농촌에서 온 농민공(民工)“(59쪽-60쪽)인데, 왕샤오밍은 이러한 계층들의 분화가 “상해의 경제, 경제, 문화구조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60쪽)고 본다. 이들 계층 중에서 신부유층의 급격한 성장은 새로운 권력구조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우상의 출현과 이상적 생활의 유행과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과 포획을 당연하게 여기게 한다(75쪽).
다이진화는 인터넷 닷컴의 시대에 발견되는 “약자들의 카니발”, “보통사람들이 말을 하다”와 같은 표현이 1990년대 문화영웅의 이미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을 “반영웅의 문화영웅 글쓰기”(96쪽)로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영웅의 글쓰기는 많은 문화적 함의들의 충돌을 낳았다. 예컨대 지식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성찰, 관방과 대비되는 ‘민간’의 의미화, 대중매체와 소비주의 담론에서 표상되는 문화영웅 서사의 유행과 그로 인한 글쓰기 주체로서 ‘민간’의 폭력성의 우려 등은 “특정한 단계에 처해 있는 흔적과 잔해, 혹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문화풍경”(111쪽)을 낳는다.
레이치리가 말하는 ’샤오바오‘는 “정치 상층부에 말을 듣고 정치에 치중하며 정치적 노선과 방향에 신경을 쓰는 다바오(大報)와는 달리 일반 인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서민의 노선을 추구하며 구매력 있는 시민, 집단의 취향에 맞는 담론을 생산한다(183-4쪽). 그는 가장 자본화되어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인 선전에서 발행하는 <남방도시보>가 판금 조치를 당했을 때, 예외적으로 신문사가 중국 관방을 향해 반발했던 사건을 자유경쟁과 시장자유주의를 선호하는 새로운 개인들의 대리행위로 보고 있는 듯하다. 이 신문이 작성하고 있는 수많은 기사들은 시장과 권력, 계층과 재부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고, 이것은 기존에 중국의 ”다바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의 행복한 삶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188쪽)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샤오바오의 등장과 활동은 중국의 대중언론매체의 성장에 기여한 바 있지만, <남방도시보>가 판금에 항의하다 살아남기 위해 선전시 당국에 백기를 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필자는 이러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매체들이 정치적 논리가 아닌 시장의 논리에 흡수되는 면을 우려하고 있다. 새로운 자율적 문화현상들의 출현과 그 출현 이면에 존재하는 시장 이데올로기의 논리가 교차되는 점이 현재 중국의 문화현실이 안고 있는 딜레마이자, 중국 문화연구자들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3. 중국의 문화현실 분석-미디어, 소비공간, 그리고 상해
한국에서 문화연구의 붐이 일어날 때, 가장 많이 시도되었던 문화현실 분석 대상이 대중매체와 소비공간이었듯이 상해 문화연구자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 역시 글로벌한 상해에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매체와 소비공간이다. 이 책에서 필자들이 분석하고 있는 토픽들은 대중적 신문, 인터넷, 텔레비전 다큐멘타리와 같은 매체들과 노래방, 호텔, 바와 같은 소비공간들이다.
중국의 인터넷 문화의 현황을 다룬 뤄강의 글은 국가에 의해서 통제되지만, 개인들의 새로운 소통 채널로서 중국 인터넷 공간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중국 인터넷의 흥기과정은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권력이 신기술의 해방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고, 도 ‘신경제’(新經濟)가 ‘시각’적 수요를 끌어당겨 마구 ‘돈을 날리며’ 공짜로 개인이나 단체에 대량의 인터넷 공간을 제공하는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인터넷이 점차 성숙하고 확대됨에 따라 권력 역시 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215-6쪽)는 단계이다. 필자는 중국에서 인터넷이 통제되는 다양한 사건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인터넷 공간 역시 개인, 담론, 권력, 자본의 경합이 이루어지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공간으로 파악한다. 중국의 인터넷 문화환경의 이중적인 조치들은 새로운 민주주의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양면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결국 이 문제는 인터넷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저항의 목소리를 인터넷 권력이 어떻게 보장하고 배제하는가와 직결된다.
중국에서 새로운 소비공간으로 부상한 노래방과 MTV의 테크놀로지를 분석한 난판의 글은 노래와 시의 감성적 서정성을 테크놀로지로 조작하는 소비자본주의의 두 매체의 특성을 언급한다. 필자는 노래방과 MTV를 소비하는 대중들이 국족과 국경을 초월해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고 있다면 그 안에 내장된 “전자기술과 기계 그리고 시장의 사회동원 능력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과 기계가 노래의 진정한 주인이 될 정도로 노래방은 “주체의 환상을 완성시키는”(134쪽) 테크놀로지이다. 다의적이 영상기호로 조합되어 있는 MTV 역시 음악 본래의 전통적인 기능과 유희 방식을 전환했다고 본다. 이는 마치 “정련된 시가 언어의 결정체인 것처럼, MTV 역시 영상기호의 시로 변모”(140쪽)하는 표의체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 문화현실의 ‘센다이화’의 지표를 감지할 수 있는 또 다른 토픽이 바로 도시공간의 글로벌화이다. 특히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도시공간의 글로벌화는 당대 문화현실의 특이성을 감지하는 촉수와도 같다. 상해 도시공간의 진화를 오랜 일상경험을 통해 반추해내는 왕샤오밍의 글은 ‘거세된 상해’와 ‘생성된’ 상해의 비교, 그리고 상해 도시를 뒤덮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의 상품광고 분석을 통해서 현재 상해 도시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읽어낸다. 상해에서 사라진 공간은 공업지역, 공공정치 장소, 골목길이다. 대신 새로 융성하고 있는 공간은 고속 간선도로, 상업지역, 세련된 정부 및 국유 독점 기구의 사무공간이다. 상해를 삭제하고 업로드하는 기제는 바로 신부유층이 주도하고 있는 주류 이데올로기이고, 이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광고이다. “상하이에서는 상업광고가 가상적인 그림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래서 주택과 자동차 등의 광고화면 연출만으로도 주태공간과 모든 물질공간의 변화에 집중하는 식의 시각적 재현패턴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는 지적은 주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광고의 상징 효과를 간파한다. “주택을 중심으로 형성된 건축공간, ‘집’을 인생의 중심에 두는 심리구조, 주택과 거주를 핵심으로 하는 일상생활의 방식”(337쪽)이 상해 도시공간을 지배하려는 주류이데올로기의 요체인 것이다.
상해의 초현대식 호텔 공간을 조명한 차이샹의 글도 상해 도시공간의 현대성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텍스트를 제공해 준다. 그가 생각하는 상해 초현대식 호텔의 의미는 아리프 딜릭이 언급한 “이탈의 미학”에 근접한다. “고층건물의 그 돌출적인 표지성은 확장된 권력의 식민성을 가리키며, 이에 뒤따르는 것은 바로 장소에 대한 망각과 말살이다”는 언급은 높이를 추구하는 상해 호텔의 욕망은 “직관적인 속도에 대한 숭배와 추구”(354쪽)라는 근현대성의 핵심 특질을 의미화한다. 초고층 호텔이 상상하는 것은 결국 권력, 부, 신분에 대한 상상이며 이것은 “중국의 본토화”보다는 “서양화”의 공간을 이식한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4. 진화하는 문화연구- ‘상해 노스탤지어’가 의미하는 것
차이샹은 글 마지막에 상해 호텔을 둘러싼 근현대성의 상상이 우리의 일생생활에 침투하여 우리의 생활방식을 새롭게 조직하고 있다고 언급(388쪽)하면서 이 상상에 ‘노스탤지어’ 방식이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상해 노스탤지어는 상해 도시의 현대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코드일 뿐 아니라, 중국 문화현실의 상징체계를 엿볼 수 있는 은유이다. 상해노스탤지어는 프랑스와 영국의 조계지였던 1930-40년대 상해의 우울하면서도 화려했던 기억에 대한 향수를 생산한다. 당시 상해가 우울했다는 것은 정치적 식민지로서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개조의 대상이었다는 의미이고, 화려했다는 것은 식민주의자들의 이국적 라이프스타일의 이식의 특이성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1990년대 상해에서 일기 시작한 상해노스탤지어가 당시 상해의 이국적이면서도 우울했던 기억에 대한 회귀를 원하는데, 그 소망의 맥락이 ‘올드 상해’의 양가적 모순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올드 상해’가 식민지 도시와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의 양가적 모순을 생산한다면, ‘당대 상해’는 탈식민적, 탈사회주의적 도시와 새로운 소비사회로의 이행의 양가적 모순을 생산한다. 새롭게 변모하는 상해의 도시공간을 경험하면서 ‘올드 상해’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두 가지 맥락에 기인한다. 하나는 소유하고 있어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을 것 같은 ‘올드 상해’의 동요하는 정체성이 개혁개방 이후 소비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맞고 있지만, 그것이 상해의 정체성을 산화시킬지 모른다는 현재의 상해의 상황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올드 상해’에 대한 향수가 지금 상해의 소비문화의 재생산을 위한 효과적인 소재가 된다는 점이다. 전자가 근대적 성찰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던 문화현상의 하나로 언급했던 탈근대적 역사적 향수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상해 노스탤지어는 이러한 근대적 성찰과 탈근대적 역사향수주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올드 상하이’ 바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힘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을 전시할 뿐 아니라, ‘올드 상하이’ 소재의 출판문화와 더불어 소비주의 풍조로 새롭게 도시의 역사를 해석한다. 동시에 중산계급과 ‘신부유층’의 취향 표준과 그들의 권력형식을 성공적으로 연역한다”는 지적대로 상해 노스탤지어는 탈근대적 역사 향수주의에서 비롯되며, 그러한 형식에 대한 근대적 성찰을 함축하고 있다. 다음의 인용을 보자.
지식인 담론이든 엘리트 서사든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정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은, 노스탤지어가 의심할 바 없이 자본, 소비주의, 전지구화와 국가권력을 제약하면서 지역성 담론을 재건하는 대문을 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소비주의와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추억이며 회상이기 때문이다(414쪽).
상해의 노스탤지어가 올드 상해를 상상하지만, 그 상상의 원천은 상해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판타지이다. 그런 점에서 상해 노스탤지어는 상해 드림으로 치환된다. 사람들은 상해의 미래의 꿈을 역석적으로 ‘올드 상해’의 향수에서 찾는다. 상해의 근대적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고, 상해의 기억들이 클럽과 출판과 디자인으로 부활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상해의 꿈과 미래를 상상한다. 그래서 “‘상하이 붐’은 상상의 산물이므로 ‘상하이 드림’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문화연구에서 ‘상해 노스탤지어’가 상징적인 토픽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중국 당대 문화가 발산하고 있는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인들의 집단적 욕망을 상상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430쪽)라는 지적이나 “‘상하이’ 붐의 배경은 근현대화의 서사이다. 그것은 ‘상하이’의 ‘근현대성’으로 전체 ‘중국’의 근현대화를 실현하는 것이다”(431)라는 지적들은 바로 상해 노스탤지어가 상해를 넘어서고 근대를 초월하려는 중국의 ‘센다이화’의 감수성을 대변한다. 중국 문화연구의 에피스테메가 상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국의 ‘센다이화’의 양면성, 이중성에 대한 성찰이라고 한다면, 상해 노스탤지어는 현재 중국 문화현실을 은유하는 언어라 할만하다. 이 책이 비록 정치적 체제는 다르지만,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문화현실에 직면한 한국의 문화현실과 문화연구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상해 노스탤지어가 상상하는 양면성, 혹은 이중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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