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역내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 지점 그리고 방법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 -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연구』 / 임춘성, 왕샤오밍 엮음 / 중국 ‘문화연구’ 공부모임 옮김 / 현실문화 / 2009
포전인옥(抛磚引玉),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난데없는 공습경보에 수도권은 한동안 큰 혼란에 빠졌다. 실상이었던 즉,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상하이로 향하던 중국민항 여객기가 피랍되어 인천 상공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이 일을 수습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은 처음으로 쌍방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칭하는 각서 형식의 공식 문서를 교환했다. 어른들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를 있게 한 주범인 오랑캐 공산도당으로, 학생들에게는 반공 포스터에 그려 넣을 괴물 형상으로나 존재하던 ‘중공’이 하나의 실체로, 황해 건너 바로 가까이 자리 잡은 이웃 나라로, ‘중국’으로 새롭게 시야에 들어오게 만든 사건이었다.
사반세기 전의 일이다. 양국이 수교한 것은 다시 10년 뒤의 일이지만 이때부터 소위 중국 붐이라는 것이 슬슬 형성되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민항기 사건이 있고서 몇 년 후 내가 중문과에 입학했을 당시까지만 해도 동시대 중국에 관해 찾아볼 수 있는 책다운 책이라고는 리영희 선생이 엮은 『8억 인과의 대화』(1977)와 『10억 인의 나라』(1985)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학의 다른 분야, 이를테면 중국의 고전에 관한 책이라고 딱히 풍성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구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는 ‘죽의 장막’ 너머 저 중국 대륙의 ‘오늘’에 관한 우리의 앎은 참으로 빈약했다. 대학가 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의 서가에 꽂혀 있던 일군의 책들이 있긴 했다. 일본서적의 번역을 경유해 우리 손에 쥐어졌던 중국혁명사들이다. 이들은 현대 중국의 중요한 맥락을 짚어주었고, 운동의 이론적 기초 구실을 하기도 했으며, 변혁에의 열정을 북돋아 주기도 했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쳐 이른바 개혁개방의 시대에 들어선 동시대 중국을 제대로 가늠케 하기엔 너무나도 편향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편향적이었느냐 하면 우리의 열망을 한껏 투사한, 우리가 보고 싶은 중국만을 보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학가 서점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된 오늘, 거대서점의 서가에는 수교 이후 거품처럼 부풀어온 중국 붐을 타고 관련 책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중국을 바로 알게 해주는 책으로 치자면, 더구나 소통과 연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앎을 구성하는 책으로 치자면 여전히 몇 권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전과는 또 다른 편향들이 그 숱한 페이지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중국 관련 읽을거리는 제각기 객관적이거나 유용한 지식을 주장하지만 종종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혹은 미국 패권적 시각이 투사되어 있거나 새로운 형태의 모화주의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게다가 교양을 가장한 가벼운 흥밋거리에 불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을 향후 미국과 세계를 두고 한 판 겨룰 잠재적 초강대국으로 간단히 기정사실화하며 동아시아에서의 위협을 강조하거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덩치만 큰 허깨비로 손쉽게 단정하며 그 낙후성을 비웃는 온갖 이야기들이 도대체 실상의 중국에 관해 무슨 쓸 만한 지식이 된단 말인가. 소통과 연대 그리고 공존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근심스럽다. 중국을 다만 시장으로만 간주하거나 놀러 다닐 곳으로만 여기는 태도는 그래도 덜 위험하고 나름대로 ‘실용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을 담론의 객체로만 삼게 되면 실제의 중국은 사라져 버리고 주체의 욕망만이 덩그러니 남게 된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현실 중국과 만난 날이 늘어나고 사람들의 사유도 영글면서 읽을 만한 책들이 지어지고 번역되어 한 권 두 권 늘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 -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연구』도 그 중 하나다. 중국 측 편자인 왕샤오밍 교수는 책 서두에 ‘포전인옥’을 거론했다.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중국에 ‘포전인옥(抛磚引玉)’이란 속담이 있다. 문자적 의미는 ‘벽돌을 던져서 옥(玉)을 취한다’인데, 심층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고귀한 의견을 받기 위해 자신의 미숙한 의견을 내놓는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책이 하나의 ‘벽돌’로 한국 독자들에게 다가가서 중한 양국의 보다 많은 사상과 학술을 교류시키는 ‘옥’으로 발전해 가길 바라며, ‘아시아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길 희망한다.”
이처럼 이 책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던져졌다. 그 가능성은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공유하고 있는 접근방법과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필자들의 글을 각기 다른 역자들이 번역한 책이다 보니 불가피했을 문제점들이나, 뽑혀 실린 글들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 현상에 집중되어 도농문제나 민족문제 등을 다룬 글이 없다는 점 등은 따로 자세히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한 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문화연구로 그린 문화지도, 소통과 연대의 지점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 -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연구』. 처음 봤을 때는 사실 본제목과 부제목이 좀 어긋난다는 생각을 했다. ‘21세기’와 ‘포스트사회주의’는 그렇다고 치고, ‘중국의 문화지도’와 ‘중국의 문화연구’라는 짝 때문이었다. 첫 대면에 ‘중국의 문화지도’는 ‘<중국의 문화>를 그린 지도’로 읽혔다. 그렇고 그런 ‘한 권으로 읽는 중국문화’ 부류의 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후딱 스쳐가게 만드는 다소 판에 박힌 제목이다. 반면 ‘중국의 문화연구’는 단순히 ‘<중국의 문화>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당대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적이며 학제적인 접근방법으로서의 ‘중국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로 읽혔다. 그런데 편자의 서문과 이어 실린 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다 보니 이 제목이 사실은 퍽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포스트사회주의로 자신들이 놓인 역사시공의 좌표를 인식하는 중국의 학자들이 문화연구의 방법으로 그린 21세기 중국문화의 지도였던 것. 나아가 소통과 연대로 열려있길 갈망하는 문화지도였다.
중국 측 편자 왕샤오밍 교수는 1990년대를 경과하며 문학연구로부터 문화연구로 전환한 중국의 첫 세대 문화연구자로 소속 학교에 연구센터까지 만들어 이 분야의 후학을 키우고 있다. 그는 손쉬운 이분법으로도, 최신의 서구 이론으로도, 정치와 경제 영역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도 도저히 잘 포착되지 않는 거대한 괴물 같은 중국 현실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문화연구’를 택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국 측 편자인 임춘성 교수의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상황에 관한 개관과 각기 상하이와 베이징의 문화연구를 대표하는 왕샤오밍과 다이진화 교수의 선언적 글들(제1부)에 이어, 소비 시대의 서정형식으로서의 노래방 문화에 대한 탐색에서부터 신기루 같은 도시 광둥성 선전에 있는 거대한 민속문화촌의 문화정치적 기능에 대한 해석에 이르기까지(제2부), 그리고 최근 15년 상하이 공간을 구성하는 힘과 욕망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장아이링 붐’에 숨겨진 욕망과 상하이 드림이라는 환영에 대한 비판적 성찰(제3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대상들에 대해 그 만큼이나 다양한 견지에서 파고들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중국 현실에 대한 필자들의 치열한 애증이라고 해야 하겠다. 중국식 문화연구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글들을 읽다보면 레이몬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마셜 맥루한,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이 오늘날의 문화연구와 매체연구를 정초한 학자들로부터 앤서니 기든스, 아르준 아파두라이 등 모더니티와 현대사회에 대한 최근의 이론적 성찰을 이끄는 학자들에 대한 직접적 참조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짐짓 모른 체 하는 경우도 있으며, 자라면서 싫든 좋든 훈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마르크스를 우직하게 묵수하는 경우도 있으며, 애써 그 유산을 넘어서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 책에 뽑혀 실린 모든 글은 다소간 이런 경향들을 이렇게 저렇게 공유하되 결코 이론에의 경도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세련된 이론이 중국 사회에 근사하게 적용되는 현장을 보고 싶어 하거나, 중국 사회의 이런저런 현실이 이론적으로 귀납되어 특별히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실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대만 조금 접는다면 이 책의 미덕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방면에 걸친 영향의 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단일한 이론에 대한 저항. 그 미덕이란 중국에 대한 어떤 단일한 인상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실상과 실감과는 유리된 채 안팎에서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려고 하는 허상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아우를 수 있는 어떤 태도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기어츠가 제시했던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 정도일지 모르겠다. 이러한 기본적 방법은 사회현실에 대한 넓은 의미에서의 좌파적 관심과 열정 위에 놓여 있으며, “오늘날 문화는 매체의 문제다.(Culture today is a matter of media.)”라는 프레드릭 제임슨 식의 명제에 기초해 미적 양식이자 기술적 수단이며 사회적 제도인 매체에 주목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필자들은 제발 중국이 이렇다 저렇다 쉽게 단정 짓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는 듯하다. 이론은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고 새로운 성찰로 이끌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야를 한정하고 의미 있는 차이들을 무화시키기도 한다. 이론을 거절하지 않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은 채 두텁게 기술된 중국 사회문화의 여러 현상과 맥락들은 때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낯설며 때로는 우리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가 잊고 있었거나 애써 잊으려고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가 보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여러 학문분야들을 넘나들며 이론들을 넘나들며 그러면서도 현실에 굳게 발 딛고 있는 ‘비판적 문화연구’의 힘이다. 거기에 중국은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만큼이나 다양한 사회문화적 양상을 보여주며, 타이완과 홍콩, 마카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까지 시야에 둘 때 복수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보여준다. 게다가 오늘날 중화권이 갖는 파급력을 논외로 두고 세계 정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모든 부문에서의 역할도 커져 있다. 문화연구의 방법으로 그려진 중국의 문화지도가 갖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유와 실천을 향해 나아가는 중한 사이의, 아시아 역내의 나아가 세계적 차원에서의 소통과 연대의 주요한 지점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요컨대, ‘중국’을 화두로 우리 모두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다시, 포전인옥, 소통과 연대의 방법
이 책은 소통과 연대라는 ‘옥’을 기대하며 던져진 하나의 벽돌이다. 원래 ‘포전인옥’이란 말은 송대의 불서 『전등록』에 나온다. 당 나라 때 쑤저우 사람 상건은 평소 흠모하던 시인인 조하가 근교의 영암사로 나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절의 벽면에 미완성 시구 두 행을 적어 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조하는 갈데없는 시인인지라, 지나가다 발견한 구절을 지나치지 못하고 두 구절을 덧붙여 근사한 시로 완성했다는 것. 이를 일러 후대 문인들이 ‘포전인옥’이라고 했다 한다. 왕샤오밍이 인용한 것도 이 의미다. 자신이 뽑은 글을 ‘벽돌’에 빗대고 있으니 중국인 특유의 겸양일 수도 있겠고, 중국의 문화연구가 아직 미숙하다는 자각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겠다. 하고 싶고 해야 할 이야기를 온전히 다 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빗댄 것일 수도 있다. 뽑힌 글의 필자와 주제가 더 포괄적이지 못한 데 대한 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 ‘주고받기’의 과정에서 ‘옥’이 나타난다는 인식이다. 그리고 내가 던지는 이야기가 절대적이지 않고 그저 그럴듯한 것일 지도 모른다는 헤아림이다. ‘포전인옥’은 명청대에 오면 이른바 삼십육계 가운데 하나로 끌어들여진다. “동류의 것으로 유인해 몽매한 상대를 친다.(類以誘之, 擊蒙也).”라는 설명이 붙는데, 속임수를 적절히 구사하는 계략이란 뜻으로 의미가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類’란 적당히 비슷한 것(擬似)이 아닌 내게 실제 절실한 무엇인가(類同)를 뜻하니, 내게 소중한 것을 내주는 가운데 생산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깨달음과 믿음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중 간, 그리고 아시아 여러 지역 간의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과 방법은 이런 ‘포전인옥’의 태도와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내게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나눌 때 거기서 믿음이 생기고 소통이 일어나며, 각각의 현실과 차이를 은폐하거나 억압하지 않은 채 더 정치하게 이론화할 수 있는 길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우리의 벽돌을 중국과 아시아를 향해 던지는 것에 대해서도 활발한 토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소통과 연대의 가능한 여러 지점들과 방법들에 대해서도 진지한 탐색이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이고 싶다.
閔正基
인하대학교 중국어중국학전공 부교수. 1968년생.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주요 논저 「『點石齋畵報』가 그려낸 1884년의 上海 조계 ― 시선과 재현의 문제」, 『언어횡단적 실천 : 문학, 민족문화 그리고 번역된 근대성 ― 중국, 1990-1937』(역), 『중국 근대의 풍경 ― 화보와 사진으로 읽는 중국 근대의 기원』(공저) 등. mihn@in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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