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문화번역의 정치학

ycsj 2015. 7. 1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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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제작자가 문화연구를 학습하게 되면 문화콘텐츠 제작에 도움이 되지만, 텍스트를 분석하는 외국()학 전공자가 문화연구와 결합할 수 있는 분야는 번역연구(translational studies)’. 그리고 최근 번역연구 분야에서는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일반 번역과 달리 문화번역(cultural translation)이 주목을 받고 있다. 김현미는 근대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확고하게 구획된 모든 경계들이 그 견고성을 잃고 있는 현재, 문화 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문화 번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문화 연구에서 번역횡단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고 있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비판 인류학이 고무한 부분도 있지만, 우리 삶의 현실적인 조건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라고, 문화번역이 각광받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사실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현실적 조건은 1960년대 버밍햄학파 학자들로 하여금, 당시 영국을 풍미하던 리비스주의에서 벗어나 당시 노동자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지도록 강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들로 하여금 급변하고 있는 21세기 현실을 직시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김현미는 일찌감치 문화번역의 중요성을 설파한 만큼 그녀의 논리를 좀 더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문화번역은 타자의 언어, 행동 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화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다.”(48) 여기에는 평등한 관계와 위계적 관계가 있는데,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는 위계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위계적 관계의 문화번역을 고찰하는 데는 포스트식민주의 관점이 필수적이다. 평등한 관계의 문화번역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문화적 접경지대가 있다. “문화적 접경지대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와 번역을 통한 변형의 공간으로서, 문화번역의 정치적 의미를 부각시키며, 번역자의 행위성과 번역 효과 등을 주목하게 만든다.”(48) 그녀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이 글의 목적은 문화 번역이 근대를 성찰하는 비판적 도구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타자와 평등한 대화적 관계dialogical relations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소통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문화 번역을 둘러싼 다양한 권력 메커니즘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48)

문학/문화연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인들은 굳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문화번역 자체가 이미 권력 메커니즘에 둘러싸여 있다면, 우리는 문화번역을 둘러싼 정치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푸코는 일찌감치 담론 권력과 지식 권력 개념을 통해 지식과 담론이 정치권력과 무관하지 않음을 설파했고, 최근 한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문화연구학자인 강내희는 문화정치경제의 문제설정을 제시함으로써, 삼자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설파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문화횡단적(transcultural) 교류라는 문제의식으로 중국영화를 대상으로 민족지 이론을 문화번역 이론으로 보완하려는 레이 초우(Rey Chow. 周蕾)의 문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민족지는 불평등한 문화번역이다. 서유럽 관찰자가 비서유럽 관찰대상을 주관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시각성(visuality)을 매개로, 그녀가 제기하는 대안은 그동안 보여지는대상이었던 토착민이 보는 주체로 새로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식의 방어적 토착주의와는 다르다. 레이 초우의 문화 간 번역(translation between cultures)’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불균형적이고 위계적인 권력관계와, ‘오리지널번역사이의 불균형적이고 위계적인 권력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동아시아 권역 내 문화 간 번역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녀가 문화 간 번역전통에서 근대로, 문학에서 시각성으로, 엘리트학자문화에서 대중문화로, 토착적인 것에서 외국의 것으로, 외국의 것에서 토착적인 것으로 등등의 변화를 비롯해서 광범위한 행위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아시아 권역 내 광범한 횡단과 소통을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국적 문화 횡단과 소통의 시대에 문화번역/문화 간 번역은 필수적인 과제다. 한국의 영웅문 현상은 진융(金庸) 텍스트의 두터움을 충분히 번역하지 못하고 그 표층인 무협 층위만을 번역한 점에서 부정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출판사가 주도했을 표층 번역은 당시 독서시장 요구에는 부응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우리는 중국에 대한 심층 학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21세기의 새로운 완역은 독자에게 외면당했다. 대중문화에 각인된 문화를 번역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진융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업적 번역은 표층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오역되면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영웅문 키드들이 완역된 사조삼부곡에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그 증좌다. ‘문화번역은 심층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문화 텍스트에 각인된 타국 문화를 자국 문화 맥락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가져오기 전 반드시 타국 문화 맥락에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문화 횡단과 소통은 쌍방향/다방향의 들고나는 행위가 반복되고 그 반복의 차이가 축적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동아시아 권역 내 대중문화의 횡단과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는 우선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원산지인 미국을 하나의 지방으로 설정하면서 각각 자기 민족지(auto-ethnography)’를 기록할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미국 대중문화도 대부분 아프리카 흑인문화에 그 기원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이제 동아시아는 오리지널로서의 빌보드 차트에 연연해하지 말고 동아시아 자체를 그리고 자국을 문제화해야 한다. 그 후 동아시아 내부에서 각자의 특수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상대방 문화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쑨거(孫歌)는 근현대 일본사상사를 고찰하면서 다케우치 요시미를 따라 일본의 근대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로부터 루쉰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계발되어 다시 중국의 근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한국과 지적 연대를 장기간 지속한 소수의 타이완인을 자처하는 천광싱(陳光興)경계 넘기와 교류는 자신이 처한 곳을 잘 보고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는 진리를 깨닫고 서울을 이해하는 만큼 타이완을 더 잘 알게 된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워한다. 쑨거가 일본에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루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획득하고 천광싱이 서울을 이해하는 만큼 타이완을 더 잘 알게 되었듯이, 우리도 중국, 일본, 그리고 타이완에 들어가 심층 관찰한 안목으로 한국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학인의 출현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