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hang, Yingjin, 2002, Screening China: Critical Interventions, Cinematic Reconfigurations, and the Transnational Imaginary in
Contemporary Chinese Cinema,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Annarbor.(Second Printing 2003)
張英進(2008), 胡靜譯,『影像中國-當代中國電影的批評重構及跨國想像』, 上海三聯書店, 上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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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프롤로그ㅡ세기말 중국을 고찰하다
영화사가는 문화 대신 영화들과 상호 작용한다. 이는 사회경제학사의 고속도로와 개인 전기의 민간 길 사이 어디엔가 놓인 중간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다양한 문화경관이 놓여 있다. 그 경관의 생태학은 제도, 표현, 억압, 그리고 권력장에 종속된 모든 것들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상호작용으로 특징지어진다.
두들리 앤드류, 『필름과 역사』
1-1영상중국
1-1-11980년대 중엽 최근(contemporary) 중국영화가 각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고 아울러 서양학술계에서 체제화 된 이래로 그것(중국 영화)은 두들리 앤드류가 위에서 말했듯이 ‘다양한 문화경관’의 일부분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가 어떤 중국 이미지가 제작되고 상영되는지와 관련해서 여전히 억압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번역본에 생략된 부분) 서양에서는 국제영화제가 중국과 중국성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에 부합되는 ‘예술영화’와 전복적인 ‘지하영화’만을 선택함으로써 서양 소비를 위한 그런 영화들을 더 많이 만들 것을 고무하고 있다. 한편(meanwhile) 홍콩과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 영화제작자들(filmmakers)은 일련의 영화 표현 방식을 지속적으로(continue to) 발명하고 확장했으며, 국내 체제(regimes)와 전 지구화의 지속적인 위협에 직면해서(vis-a-vis) 그들 자신의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고, 새롭게 상상했다.
## 1980년대 이후 중국영화의 국제적 부상에 대한 세 층위의 분석: 중국정부, 서양영화제, 중국 영화제작자
1-1-2세 세트의 문제들이(각자 세트로 이루어진 다음의 세 가지 문제가) 이 책에서 분석하는 중심 의제를 구성하고 있다. 첫째, 영화 담론과 비평담론(cinematic and critical discourse)에서 투사되고(projected) 문제화된 ‘중국인다움(Chineseness)’. 둘째, 서양 ‘미디어 연구(media studies)’에서 ‘유럽 중심주의(Eurocentrism)’와 관련된 중국 영화. 셋째, 세계에서 중국 영화의 제작, 배급, 전람 및 소비 과정에서의 본토적인 것(the local)과 전 지구적인(the global) 것 사이의 협상.
##이 책의 연구 대상
1-1-3첫째, 전 지구적 소비주의 시대에 중국 영화의 민족적이고(ethnic) 문화적인 표지들(markers)이 점점 더 문제시되고 있다. 중국이 영화, 인터넷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전 지구적으로 스크린에 옮겨짐에 따라 그 ‘중국(인)다움’은 불가피하게 다양한 시야로부터 비판적으로 정밀 검토(critical scrutiny)되고 있다.
둘째, 서양 학술계에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중국 영화는 흔히 보편적이고 초역사적 적용성을 가진 것으로 가정되는 서양 이론의 최근 ‘기술’에 의해 가공되어야 할 ‘원재료(raw material)’로 처리되곤 했다. 차이, 권력 및 권위의 문제가 발생했고, 이런 문제는 문화 횡단의 재현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자극(challenge)하여, 학과 내, 학제 간 및 초학제적 연구의 유럽 중심 모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셋째, 최근에 서양에서는 “문화적, 민족적(ethnic), 인종적 차이들이 백인들의 입맛을 강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요리로 상품화되고 제공될 것이라는 우선적 우려-대문자 타자(the Other)가 먹히고 소비되고 잊힐 것이라는-”(hooks 1992, 39)가 존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적, 문화적 차이는 지금 대문자 타자와 관련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신기한 사물과 성적 표현(eroticism)으로 소비되는 듯하다. 『음식남녀(Eat Drink Man Woman)』(1994)는 “백인의 입맛을 강화”시키기 위해 소비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서양 관객들은 이미 자신을 홍콩영화의 이국적 특성에 동화시켰다. 즉 홍콩영화는 현재 중국 요리처럼 보편화 되었다.”(Teo 1997, ⅺ)
이처럼 민족적, 문화적 이미지에 대한 서양의 강력한 요구와 국내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제한 사이에 사로잡혀, 중국 영화제작자들은 초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자신들의 존재와 생존의 조건들을 재고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마사오 미요시(Masao Miyoshi, 三好將夫)가 1990년대 초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면 어떻게 경제 및 정치의 초국화(transnationalization)를 본토 문화 및 역사의 생존-관광과 박물관 전시로 박제화하지 않고-과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1993, 747)
#정치 경제적 초국화와 문화 역사의 생존
1-1-4이 책에서 나는 두 층위에서 세 가지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 첫째, 중국 영화제작자들이 전 지구적인 것과 본토적인 것 사이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자리매김하기 위한 ‘중국의 재조정(reconfigurations of China)’과 그들의 전략. 둘째, 비평 담론, 특히 서양의 초국적 담론. 이 담론들은 수량이 제한된 중국 영화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한다. 문화횡단적 교류를 진척시킨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이론적 구성력을 전시하곤 한다.
1-1-5이 지점에서 ‘screening’이 가지고 있는 다르면서도 상호 관련된 세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첫째, ‘screening’은 ‘영상을 투사’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문화생산과 직접 관련된 창작활동이다. 둘째, ‘screening’은 은폐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창조적 전략이든 비판적 전략이든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해 전방에 스크린을 놓는 것이다. 셋째, ‘screening’은 세부묘사에서 ‘상세하게 고찰(to scrutinize)’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산만한 비평(discursive criticism)과 가장 관련 있는 행위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독자가 만나게 될 북미학술계의 비평 쟁점(critical issues)의 전후 맥락과 관련짓기(to contextualize) 위해, 나는 제1부(Part Ⅰ)에서 비평 담론의 층위에서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제2부(Part Ⅱ)에서는 초기(또는 텍스트의) 물건들로 옮겨갈 것이다. 아울러 전서를 통해(throughout) 양자 사이의 대화(an informed dialogue)를 유지할 것이다.
1-1-6중국 영화의 비평 담론에 대한 내 고찰은 여러 가지 렌즈를 드러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거대하고 복잡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ever-evolving) 독립체이지만, 렌즈에 나타난 모습은 편의적으로 분해되고 깔끔하게 포장되고 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서양 매체는 영화 검열 문제(censorship issues)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고 중국을 단일한 정치 실체, 즉 공산주의 체제로 간주하곤 했다. 이 체제는 예술의 자유를 억제하고 인간 기본권을 반복적으로 침해(제2장과 제8장을 보라)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와 유사하게 공산당의 공식 담론은 중국을, 다양한 소수민족의 결속과 위대한 국가(the great nation-state)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에 기초한 일원화된 정치 독립체로 묘사했다(envision).(제5장 참고) 반면에, 단일 민족(a singular ethnic)의 표지로서의 중국과 본질주의적 실체로서의 중국(인)다움(Chineseness)은 최근 학술 저서, 특히 인류학, 문화연구, 역사학에서 비판받고 해체되었다(Ang 1994; Chow 1998c; Chun 1996; Duara 1995). 이들 분석의 ‘파괴’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출현했다,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소 아이러니컬하게도 ‘범중국 민족성(pan-Chinese ethnicity)’이란 새로운 개념이 출현했는데, 이는 가장 최근 ‘유연한 시민권(flexible citizenship)’의 형성(Ong 1999)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났다(exemplify). 게다가 세계 각 곳의 많은 중국인 공동체를 아우르는(또는 통합하는) 초국적 실체로서의 ‘문화중국’ 또는 ‘대중국’은 광범하고 완전히 둘러싸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물질문화에 저항(Tu 1991)하기에 충분한 정신적 문명적인 역량으로 상정되었다. * formidable
#‘범중국 민족성(pan-Chinese ethnicity)’-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
새로운 문화 국족주의
1-1-7텍스트 층위에서, 중국 영화제작자들 역시 중국을 정치적 실체라기보다는 문화적이자 민족적 실체로 전용(轉用. appropriate)했다. 중국 신영화(New Chinese Cinema)의 출현은 사실 1980년대 초 중국 지식계를 근본적으로 탈바꿈시킨 지속적인 문화비판운동(文化反思)의 직접적 산물이다(J. Wang 1996; X. Zhang 1997). [그들은] 영화 텍스트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마오쩌둥 정치 문화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위해 일종의 ‘소수자 담론’을 활용(engage)했다. 특히 이국적이고 비전(秘傳)적(esoteric)인 다이(傣)족, 몽골족, 티벳족 문화에 재현된 민족적 타자(the ethnic otherness)는 자기 성찰-궁극적으로 현재 중국인 가운데 개인적 주체성을 재구성하고 재각인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는 중국(한족) 문화와 역사에 대한 성찰-의 공간을 제공했다(제5장 참고). 자신의 뿌리와 원시 생명력 찾기의 이념 같은 문화적인 것과 새로운 영화 언어 및 새로운 연출 스타일과 연관된 시각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교대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민족지적(ethnographic)’ 영화의 새로운 유형을 빚어냈다(제6장 참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국제영화제와 서양 예술영화관 순회상영에서 중국 영화의 인기는 중국 국내와 해외에서 모두 혹독한 비평을 야기시켰다(provoke)는 점이다. 천카이거(陳凱歌)와 장이머우(張藝謀) 같은 감독들은 중국의 민족적 타자를 구매력으로 삼아 이국 문화에 대한 서양 관중의 만족할 줄 모르는 구미에 영합하고 그것을 만족시켰다고 비난받았다(제2장 참조).
1-1-8그러나 사실은 다음과 같다. 최소한 1980년대 중반 자신의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중국 신영화는 개별 정체성과 주체성의 형성과 전변을 위해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분산된(discursive) 공간을 성공적으로 창조해냈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문화적,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을 표현했고, 관중들에게 자극적인 체험-무엇보다도(among others) 미적 감상, 정서적 해방, 심리적 만족, 철학적 사고, 문화 비평, 정치 간섭-을 제공했다(제6장 참조). 이런 잠재력으로 인해 중국 신영화가 영화 비평가, 문학 연구자, 문화사가, 정치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에게 열정적으로 수용된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지난 20년 동안 북미에서 최근 중국영화에 대한 학술연구와 교학현상의 신속한 발전은 그 자체로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타자(Other)로서의 중국에 대한 서양의 오래된 환상을 다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횡단적 연구와 비교 연구에서의 민감한 문제를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은 영상 중국 프로젝트와 관련해 비평의(critic's) 자아성찰과 자아정위(自我定位)의 이슈들을 특히 중시하고 있다.(제3장 참고)
1-2비판적(critical) 자아정위
##서양의 보편적 이론과 중국의 특수한 현실의 문제
global vs. local
1-2-1비평가 저우레이(周蕾, Rey Chow)와 장룽시(Zhang, Longxi) 간의 학술교전에 대해 간단한 순시를 삼는 것은, 아마도 내가 토론하려는 그 문제들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저우레이는 1991년 외국에서 온 비평가로서 다음과 같이 승인했는데, "서양화 된 것"을 인정하는 중국 여성으로써, 대부분 사상 형성시기가 모두 먼저 영국식민지에서였고, 이어서 또 영국에서 지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곤경에 직면해있다: "'서양이론'은 먼 그곳에 있어서, 내가 장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서; 나는 또한 그것과 반드시 공존해야했다." 저우레이에 대해 말하자면, 이 과정이 서양이론에 빠지는 것(침입)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서양 이론적 사고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지위를 가진 비평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저우레이 그녀 자신이 "'서양이론'을 사용해서 비서양적인 방법을 이해하는 법으로 진실한 역사의 발생을 폭로했다"고 선언했다ㅡ즉 비서양에 대한 서양의 통치는, 그녀가 평론했던 서양 매체가 톈안먼 사건에 대해 보도했던 글에서 거의 이러한 폭로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그녀의 문장제목 ⟪또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폭력: 위기, 구경거리,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중국⟫에서, 저우레이는 먼저 톈안먼 위기의 충돌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지식담론"을 확인했지만, 이어서 "미국에서 생활하는 우리와 더욱 밀접하게 관련된 일련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여기에서…중국은…서양에 대한 일종의 구경거리이다." 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저우레이는 구경거리로써의 중국을 여성으로써의 중국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중국)와 (남성)구경꾼으로써의 서양의 관계에서이다.
1-2-2저우레이는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을 예 혹은 비평렌즈로 삼아서 그것들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중국이 어떻게 서양에서 표현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첫 번째 범례의 대표작은 ⟪킹콩⟫으로 그것은 "킹콩 증후군의 그러한 체포와 모살에 관한 제국주의를 소란스럽게 하는 행위를 묘사한다." 두 번째 범례의 대표작은 ⟪안개 속의 고릴라⟫로 그것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하여금(고릴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장소와 내 사랑 안에서 생활하도록 한다'는 그러한 숭고한 정신이상 "이다. 듣기에, 이것은 한학과 중국 연구 영역의 특색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중국 전통의 권위[새로운 긍정을 얻었다]는 다른 비중국식의 질문 모델을 배척하였다. "원숭이 서술"의 비유를 통해서 조우레이는 자신의 환멸스로운 개인 체험을 중국 문학 연구로 확대시켰다.: "나는 여성한학자의 강좌에 참가해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유명한 고전중문 텍스트를 연구함으로써 그 속의 여성과 관련돼 화제를 탐구했다. 그러한 흥미진진하게 텍스트속의 세부묘사를 제기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이국 숲속에서 온 각종 디테일인 것 같다(각종 디테일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이 상황에서 한학자는 고릴라의 언어에 '굴복했다'.
1-2-3장룽시는 저우레이에 대한 급소를 찌르는 비평에서, 서양이론으로 중국현실을 대체하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론을 이처럼 교묘하게 운용하는 문제점은, 대학살의 야만스러운 사실이 문자분석 속으로 파묻혀버리고, 이러한 행위는 중국의 현실과 ⟪킹콩⟫속의 줄거리(plot)사이의 중요한 차별을 와해시킨 것이고, 뿐만 아니라, 중국현실 및 그것의 엄숙하고 초텍스트적인 본질로 하여금 할리우드의 허구적 내용을 대체 시킨 점이다." 장룽시는 특히 서양화된 이 비평가의 위치가 오만하고 잘난체 하는 중국학생들을 내려다보는 태도인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저우레이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은 바로 '정부가' 여러 층위에서 시행한 문화고립주의로 말미암아 학술공간을 박탈당했는데, 이 공간은 원래 그들로 하여금 내가 건의한 바가 있는 비판적 이해력을 구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저우레이가 여기에서 가리키는 것은 서양학술계 최근의 민주개념에 대한 해체다. 그녀는 중국 시위자들이 이런 높은 수준의 비판적 수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맹목적인 미련을 초월할 수 있는 표지를 만들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확실히, 저우레이의 추론과정에서 역사적 우연성이 유예되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서양이론에 대한 자각적인 충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직접적인 물론 "제국주의적" 이기도한 요구, 비서양적인 사고에게 서양에서 만들어졌고, 지금 유행하고 있는 서양의 그러한 "비판적 이해력을 참조해 조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서양이론은 "문화제국주의" 라는 질책을 받는 것은 분명히 면할 수 없다.
1-2-4장룽시가 "서양이론"에 대비시켜 제기했던 "중국현실"이라는 명사는, 사실 이론화하기 매우 어렵고ㅡ심지어는 근본적으로 이론화 할 수 없다. 이 점도 놀랄 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의 당대 서양이론들의 특유한 회의와 때때로 심지어 불가지론의 태도"에 직면하여 장룽시는 일종의 철학사변적인 해석 방식을 채용했으므로: "중국현실은 중국철학 관념의 태도와 매우 비슷하고, 존재하는 곳이 없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 또한 없다; 그것을 완전하게 포함할 수 있는 똑같은 사물은 없고, 모든 사물은 또한 부분적으로 모두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매일의 체험 속에 존재하고, 주의의 상황과 우리 생활의 확실한 사회 환경 및 문화 환경,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는 그러한 조건과 실질과 같은 주변상황을 구성하였다". 나는 장룽시가 여기에서 비평 주의력을 순수한 이론 또는 단순한 텍스트의 측면에서 현실 상황으로의 회귀를 소환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론적인 층위에서가 아니라, 경험주의에서이지만): 또한 초텍스트적이고 역사적이며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주는 측면이기도하다.
1-2-5저우레이와 장룽시의 자리매김은 초문화간 분석에 있어서 자아성찰의 중요성을 증명하였다. 저우레이와 서방이론을 동일한 진영에 두고, 장룽시 본인은 중국 현실과 동일한 전선에 서는 것으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가지 극단적 위치를 묘사했다. 양자는 모두 중국영화ㅡ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중국 자체ㅡ에 대한 수용과 비평 상황을 드러냈다. 내가 잠시 이 논쟁에 참여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을 명확하게 밝히는데 있는데, 우리는 스크린에서 중국을 고찰하는 것을 단방향적인 노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이는 완전히 서양에서 중국으로 온 것일 수도 있고, 이와 반대일 수도 있다. 저우레이가 중국학자들을 글로벌 모더니티에 대해 어떤 편집증적 반응에서 나와 여러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 연구와 같은 서방이론의 범례를 중국으로 끌어들이는데 노력했고 이러한 행위를 “반 박자 느리게” 서양의 최신이론발전을 따라가려고 하는 일련의 시도로 보았을 때, 그녀는 단방향적인 사유 방식에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학자가 서방이론을 창조적으로 전환시켜, 그들 자신의 역사와 문화 맥락 속으로 가져온다는 가능성을 예외 없이 모두 부정한다.
1-2-6위의 내용과 서로를 비교해보면 중국과 서양교류의 다방향 모델을 쌍방면에 존재하는 협상과 뒤섞임과 전환을 윤허했고, 특정한 경우에 심지어 중국은 "서양 풍미"를 받아들여 중국지식인과 예술창작에 도움이 되는 "창조적 오해"로 삼을 수 있었다. 때문에 최종적인 관건은 어떤 구체적인 이론이나 담론의 내원과 진실성에 있지 않고, 또한 그것이 광범위하게 공인되거나 혹은 "불가쟁의"한 우월과 권위가 아니라, 이러한 이론이나 담론이 번역되거나 "저절로 전파되어" 타양에 들어온 후 무엇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는가에 있다. 이 의미로부터 말하자면 류허는 현대중국의 "언어를 초월한" 연구에 관해서 확정한 그 관건적 문제ㅡ수사전략, 번역, 추론의 형성, 명명의 실천, 합법화과정, 그리고 중국이 현대성을 체험하는데 그것에 기대어 영향을 준 역사조건의 서술방식ㅡ에서 영상 안팎에서 중국을 고찰하는 것에 대해 모두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1-2-7류허가 강조하는 것은 현대중국이지만 이 책에서 나는 서양의 비평개입과 중국의 영화 재구성에 내 주의력을 평균적으로 분배했다. 다방향 모델이라는 이 목표를 채용하기 위해 나는 이른바 '본토인'이 자신에 대한 서양이론의 주시에 어떻게 응시했고, 이로 인해 서양이 이데올로기와 이론 면에서의 자신의 전제 및 추론 실천을 새롭게 검토하게끔 했는지를 강조했다. 서양의 비평관점과 방법문제를 살핌으로써 나는 중국영화 연구가 북미에서 체제화 된 역사를 대략적으로 윤곽을 잡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들 연구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 및 그것들이 포함되지 않게 만든 원인(초래하게 만드는 것)을 지적했다. 이러한 다방향 모델의 역사국면을 증가시키기 위해, 나는 또한 초기 할리우드 영화 안에서 중국형상의 발전, 그리고 이러한 형상을 당대중국영화인의(자아) 민속연구와 중국 "민속" 영화의 서양에서의 특이한 성공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잠재적인 영향을 소급해서 고찰했다.
1-3세기말 정서(The Fin de Siecle Ethos)
1-3-1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 때문에 ‘세기말’이라는 개념을 환기(evoke)시킨다. 첫째, 19세기말적인 특색을 가진 널리 산포된 퇴폐적 정서가 1990년대에 다시 드러났고(Barme 1999; Zha 1995), 그것은 최근 중국 영화에서 적절한 처리를 발견했다(->최근 중국 영화에서 퇴폐적 정서를 적절하게 처리했다). 『붉은 장미, 흰 장미』(1994), 『풍월』(1995), 『상하이 트라이어드』(1995)와 『마작』(1996)과 같은 영화 속에는 마약, 술, 감각적인 음악, 성이 가득 차 있고 함께 새로운 세기말 정서를 가리킨다. 나아가 우리가 ‘데카당스(decadence)’라는 단어에 대한 왕더웨이(王德威, David Wang)의 재구성, 즉 de/cadence-기존 질서의 붕괴이면서 이질적인 소리가 한곳에 있는 것(1997, 25)-을 수용한다면, 문제의 데카당스는 중국 영화제작자들이 카니발의 영화적 대응물을 무대 위에 올리거나 중국 문화에서의 텍스트적 공존(다성음?)(textual heteroglossia)을 재각인시키기 위해 사용한 수사 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다. 두 가지 전략은 모두 계몽 담론의 패권적 지위와 많은 학자들이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맹목적인 엘리트주의자의 자세에 도전하거나 일시적으로 그것을 전복시킨다.
# 중국 영화의 세기말 정서와 수사 전략으로서의 세기말 정서
1-3-2게다가 나는 최근 중국 영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인 노스탤지어에서 부분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상전벽해에 대한 영화제작자들의 정확한 각성을 가리키기 위해 세기말을 쓴다. 이는 전설적이거나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일 뿐만 아니라-『붉은 수수밭』(1987), 『롼링위』(1992), 『홍분』(1994), 『햇빛 찬란한 날들』(1995), 급속히 사라져가는 현재를 위한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아비정전』(1991), 『추월』(1992), 『과거와 건배(與往事乾杯)』. 1990년대 세기말에 데카당스와 ‘현재를 위한 노스탤지어’는 도시 세팅 영화에서 손을 잡곤 했다. 사실 도시영화는 영화적 재조정과 비평적 간섭의 접함점에서 크게 다가온다. 그 접합점에서 도시는 새로운 지역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사회주의, 초국가주의, 전 지구주의 등의 경쟁하는 담론에 의해 교차되는 공간이 된다(제7-8장 참조).
#세기말과 노스탤지어
1-3-3이백년 전에 ‘중앙 왕국(Central Kingdom)’ 이었던 중국이 새로운 밀레니엄 시기에 들어가면서 ‘다중심 세계’에 미묘하게 자리 잡고 있는(Ong and Nonini 1997, 3-33; Y. Zhang 1998, 1-17)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자신의 두 번째 세기에 중국 영화가 어떻게 잘 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영상 중국(the screening of China)이 지속될 것은 분명하다. 문화사가의 시야(perspective)에서 나는 우리 모두 앤드류가 구상한 ‘이중의 해석 탐험’-“문화적 중요성을 해석하기 위한 영화 읽기와 영화에서 전달하는 가치와 분위기를 해석하기 위한 문화 읽기”(1998, 186)를 작동시키기(put into play)-에 투신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 충심의 이중적 해석 탐험과 함께 세기말에 상호 연관된 비평적 영상 중국과 텍스트적 영상 중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이중적 해석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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