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121) 서유럽 모던과 동아시아 근현대(발췌)

ycsj 2011. 4. 8. 09:40

‘동아시아 근현대’라는 개념은 의론이 분분한 시공간이다. 서유럽의 ‘모던’은 한국에서는 ‘근대’라는 기표로, 중국에서는 ‘셴다이’(現代)라는 기표로 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와 ‘셴다이’는 자국의 맥락을 벗어나 상대국의 맥락으로 들어가면, 단순한 시간개념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므로 ‘근대’와 ‘셴다이’를 아우르는, 나아가 일본의 기표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의 기표를 설정할 필요가 대두된다. 이 글에서 잠정적으로 제기하는 ‘동아시아 근현대’라는 기표는 통합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기대하는 것이다.

근현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서유럽의 모던 과정이 있었고 동아시아는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 약간의 특수성을 가미해서 근현대 과정을 겪은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서유럽의 모던은 유럽 내부에서 순수하게 형성·발전한 것이 아니라 서유럽과 서유럽 외부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서유럽의 모던 과정을 여러 가지 모던 과정의 하나로 설정하고 다양한 모던 과정의 하나로 ‘동아시아 근현대’를 고찰하는 일이다. 딜릭의 ‘역사들’과 홀의 ‘다인과론적 접근’은 유용한 개념이다.

포스트식민적 접근에 의하면, 서유럽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등 ‘그 외의 사회’를 타자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발명되었고 ‘그 외의 사회’에 강요되었으며 ‘그 외의 사회 사람들’은 그것을 내면화했고 열심히 추종해왔던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중국에서는 ‘허우셴다이’로, 한국에서는 ‘탈근대’로 번역되었다. 지속(after)과 변화(de-)의 이중적 의미를 절합시키고 있는 post-를 하나의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중국은 後의 측면을 한국은 脫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역으로 중국에서는 脫의 측면이, 한국에서는 後의 측면이 간과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동아시아가 서로 공동의 ‘기표’를 만들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상호 의사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 글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한국의 ‘탈근대’와 중국의 ‘허우셴다이’는 동아시아의 ‘포스트근현대’로, 한국의 ‘탈식민’과 중국의 ‘허우즈민’은 동아시아의 ‘포스트식민’으로 표기하자는 것이다.

‘내재적 유배’ 또는 ‘셀프-오리엔탈리즘화’는 서유럽의 모더니티를 내면화한 결과다. 동아시아의 근현대 과정에서 ‘서유럽지향적 소외’는 명시적이었고 따라서 쉽게 투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반면, 근본주의적 또는 전통지향적 소외는 서유럽을 부정하면서 자국의 전통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에 토착적 주체의 형성과 혼동되기 쉽고 따라서 서유럽지향적 소외의 극복으로 착각되곤 한다. 이 두 가지 소외는 함께 극복되어야 한다.

이처럼 ‘서유럽 모던’과 ‘동아시아 근현대’의 관계는 단순한 번역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타자화와 내면화의 문제, 서유럽지향적 소외와 전통지향적 소외의 동시 극복 문제 등과 연계된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