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111) 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 (발췌)

ycsj 2011. 1. 5. 12:39

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

 

차이의 국면으로서의 동아시아

 

동아시아는 서유럽에 의해 명명되었다. 근현대(modern) 이전 동아시아 지역에는 ‘우리 의식(we-ness)’이 존재했던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은 중세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중일 삼국이 충돌한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당시 세 나라는 스스로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지 않았고, 근현대 초입 새로운 동아시아 판도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청일전쟁에서도 그러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는 서유럽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무력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동아시아를 구성했다. 그리고 동아시아가 그것을 내면화(internalization)했다. 서유럽의 동아시아 명명을 범박하게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 할 수 있고, 동아시아에서 몇 세대에 걸쳐 “지식인, 학자, 정치가, 평론가, 작가라는 오리엔탈리즘에 꿰뚫린 사람들이 반복 재생산한 표상=대리 표출(representation)에 의해 구성된 현상”(고모리 요이치, 『포스트콜로니얼―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을 셀프 오리엔탈리제이션(self-orientalization)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와 서유럽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서유럽에 의한 동아시아 구성, 동아시아에 의한 서유럽 수용과 상상, 동아시아에 의한 서유럽 응시(gaze), 그리고 동아시아에 의한 동아시아 상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근현대 이래 동아시아가 서유럽에 의해 상상되고(imagined), 발명되고(invented), 구성되고(consisted), 조직되었(organized)던 것이라면, 이제는 동아시아 스스로 주체적으로 상상하고 발명하고 구성하고 조직하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것이 가능할까?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국민이, 나아가 러시아와 몽골과 미국의 국민이,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 각국의 국민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홍콩인다움(HongKonger-ness)’과 ‘상하이인다움(Shanghainese-ness)’의 상위에 ‘중국인다움(Chinese-ness)’을 두듯이, ‘한국인다움(Korean-ness)’과 ‘일본인다움(Japanese-ness)’의 상위에 ‘동아시아인다움(East-Asian-ness)’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다시 동서로 갈리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대립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동아시아 공동체는 요원한 과제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재로서 동아시아는 실체로서 존재하기보다 지향하는 가치라고 답변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러기에 지정학적 실체로서의 동아시아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대개 자기모순에 빠진 반면, 그와 거리를 두면서 지식인의 자기반성과 해체의 계기로 삼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다케우치 요시미, 천광싱), ‘프로젝트로서의 동아시아’(아리프 딜릭),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백영서), ‘태도로서의 동아시아’(쑨거) 등의 접근은 나름 성과가 있었다.

이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를 ‘차이의 국면(dimension of difference)’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를 고정된 실체로 볼 것이 아니라, 각 국가의 차이들이 나타나는 국면, 차이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정체성, 그리고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동원된 차이들의 부분집합 또는 차이의 절합(articulation)을 자연화 하는 과정으로 보자는 것이다. 아울러 ‘차이의 국면으로서의 동아시아’를 ‘타협적 평형(compromise equilibrium)’으로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각국의 서로 상충하는 이익과 가치가 모순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동아시아를 일국의 정체성 또는 패권의 통합력과 타국 정체성의 저항력 사이의 투쟁 또는 각축의 장으로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문화의 유동과 횡단

 

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은 무엇보다 대도시 중심의 대중문화 영역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브루스 리(李少龍)와 첼시아 첸(陳秋霞)을 앞세운 칸토 팝(Canto-pop)이 아시아를 호령한 데 이어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일류(J-pop), 그리고 영화와 음악, 드라마를 앞세운 한류(K-pop)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초국적(transnational)으로 수용되어온 역사적 사실은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초국적 유동과 횡단을 잘 설명하고 있다. 최근 급속한 경제성장과 내수 확대를 바탕으로 장이머우(張藝謀) 및 앙 리(李安) 등 명망 있는 감독과 중국적 무협을 앞세우며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중국 대중문화(C-pop)는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탈영토적 문화 횡단(de-territorial transculturation)’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금석이다.

이와 더불어 동아시아 각국의 영화 시장을 동시에 겨냥하고 있는 합작영화의 제작, 여성연대운동과 같은 동아시아 지역의 민간연대활동, 동아시아 내부의 국제결혼과 유학 등은 국가의 경계를 횡단하면서 동아시아를 지역화(regionalization)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희연과 박은홍은 ‘사회적 아시아(social Asia)’를 제창하면서 “국가 주도의 지역협력(state-centric regionalism)과 자본 주도의 지역협력(capital-centric regionalism)을 뛰어넘는 ‘참여지향적 지역협력(participatory regionalism)’의 실현”(『동아시아와 한국: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동아시아 공동체는 국가를 뛰어넘고 자본의 통제를 벗어나 시민의 연대로부터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출판인 회의

 

이런 맥락에서 볼 때 2005년 도쿄에서 시작해 동아시아 3국 5지구(한·중·일·타이완·홍콩)의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는 주목을 요한다. 이들은 다년간의 논의를 거쳐 2009년 동아시아 인문도서 100권의 책(한·중·일 각 26권, 타이완과 홍콩 22권)을 선정해 상호 번역하기로 합의했다. 2008년 4월 제6회 교토회의에서 선정 기준을 논의하면서 6개항에 걸친 도서 선정의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 동아시아에서 공유되어야 할 ‘현대의 고전’, 다른 지역의 독서인과 자국의 젊은 세대 독자를 대상으로 자국 인문학의 정수라 할 만한 서적, 과거 50년을 중심으로 각국과 각 지역의 인문서의 커다란 흐름과 전개·발전을 통람할 수 있는 도서, 각국의 독자적인 고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통의 고전과 서유럽의 고전에 관한 새로운 연구나 해석, 상호 번역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또한 그 실적 역시 현저하게 부족한 동아시아의 인문서, 그리고 상호 번역 출판이 가능한 학술적 전문 가치가 높은 인문서가 그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른바 ‘고전’과 특정 문학·예술 장르(시가·소설·희곡)의 작품은 이번 추천도서에서 제외된 점이다. 이는 고전과 작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상당한 분량이 번역되었음을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각국과 각 지역이 나름의 방식으로 선정하고 2009년 2월의 도쿄회의와 4월의 리장(麗江)회의에서 검토한 후 2009년 10월 제9회 전주회의에서 100권의 최종 목록을 결정·공표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 100권에 대한 해제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을 각각 출간했다.

동아시아 인문도서 100권의 책을 선정하고 상호 번역 출간하는 일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 시기에 존재했던 ‘동아시아 독서공동체의 재생’을 지향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독서대학을 기획하고 있다. 인문서의 침체와 위기가 비단 우리 독서계만의 현실이 아닌 시점에, 동아시아 독서공동체의 구상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지 아니면 남상(濫觴)의 가능성을 열어줄지는 예의 주시할 일이다.

동아시아 출판인회의에 대해 비판이 없을 수 없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북한의 부재다. 똑같은 분단체제이면서도 중국과 타이완은 1국 2지역으로 포함되었는데 유독 북한만 제외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북한에는 과연 함께 공유할 만한 인문서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추측컨대 정치적 상황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동아시아 (학문)공동체의 가능성

 

지난 3월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은 동아시아에서 북한이 얼마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알려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그동안 북방 외교니 하면서 냉전 시대의 적대국과 동맹을 맺곤 했던 ‘포스트냉전 국면’이 일순간에 ‘냉전 국면’으로 회귀되었고 ‘남한-미국-일본’ 대 ‘북한-중국-러시아’의 대립구도가 재확인되면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까지 요원하고 험난한 길이 놓여 있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침몰 원인을 북한의 어뢰 공격이라 단정한 공동조사단의 발표와 그에 대한 반박을 통해 우리는 어뢰 공격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북한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의 핵심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서 북한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발상은 일본의 원로학자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에게서 구체화되고 있다. 그는 「21세기에 ‘동아시아 공동체’가 갖는 의미」(『창작과비평』 제146호)라는 글에서 ‘동아시아 공동체’에 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글로벌화라는 비가역적인 동력’을 특징으로 하는 21세기의 도전에서 ‘인간성을 제고하는 글로벌화(humanized globalization)’를 제시하면서 그를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평화의 글로벌화’, ‘모든 인간이 기아나 빈곤에서 해방되어 격차 없는 공정한 자원배분을 달성하는 것’, ‘자연과의 환경친화적(ecological) 공생을 달성하는 것’, ‘타자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사상, 종교, 습속, 편견 등을 극복하는 것’이 그것이다.

북한을 중심에 두고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한 독특한 발상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북한이 약한 고리임을 전제한 것이다. 그가 볼 때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최우선 과제는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을 극소화하여 제로로 만들고, 또 북한이 전쟁 가능성은 없다고 믿을 수 있는 정치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시아 공동체’ 건설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사카모토가 구상하는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는 ‘비핵공동체’이자 부전공동체(security community)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현재 이 지역에서 안전보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지역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해 동아시아를 초월하는 동아시아를 구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실천은 국가보다는 시민에게 달려 있다.

사카모토의 구상은 최원식의 ‘소국주의에 기초한 중형국가’ 구상 및 백영서의 ‘복합국가론’과 맞물려 있다. 전자는 한반도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국과 조선이 합의하고, 일본 및 중국과 합의하며 동남아 각국과 합의한다면, 나아가 세계 각국과의 합의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대동세계가 되는 것이다(『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후자는 “단일국가가 아닌 온갖 종류의 국가결합 형태, 즉 각종 국가연합(confederation)과 연방국가(federation)를 포용하는 가장 외연이 넓은 개념”(「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39호)으로 제기되었다.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시민공동체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 시민공동체는 당연히 국경과 지역을 횡단해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가 ‘동아시아를 함께 사유하는 훈련’(최원식)이다. 그리고 ‘북한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는 훈련’도 아울러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학문공동체는 시민공동체와 유기적 연계를 가지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