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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겨레신문]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ycsj 2011. 1. 12. 14:14

 

[한겨레신문] 2011기획: 중국의 길--실험과 도전

제1부  변화하는 중국, 중국이 바꾸는 세계: (4)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http://www.hani.co.kr/arti/SERIES/288/457424.html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의 저자 마틴 자크의 인터뷰 기사

 

Jacques(2009), Martin, When China Rules the World: the End of the Western World and the Birth of a New Global Order, The Penguin Press, New York.

 

아래는 1년 전쯤 미국에서 이 책을 훑어보고 블로그에 올렸던 메모 성격의 글입니다.

(http://blog.daum.net/csyim2938/?t__nil_login=myblog)

 

최근 영어권에서 중국의 미래에 대한 분홍빛 전망을 담은 도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중국의 부상(the rise of China)’, 중국이 세계를 ‘바꾼다(to change)’, ‘움직인다(to move)’, ‘흔든다(to shake)’, ‘지배한다(to rule)’ 등의 언설이 저널리즘의 표제를 넘어 학문적 의제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판단은 지난 30년 중국의 경제적 성장에 근거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서양의 잣대로 중국을 평가해서는 안 되고 중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그 가운데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아시아 연구센터(Asia Research Centre)의 객원 연구원인 마틴 자크(Jacques, Martin)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날(When China Rules the World)』에서 ‘서양 세계의 종말(the end of the Western world)’과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의 탄생(the birth of a new global order)’이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해 학계와 독서계의 광범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최근 중국의 부상(rise)에 대한 서양의 주류적 견해 및 공감대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오독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중국을 관찰할 때 서양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중국적 특색을 충분히 고려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중국적 특색으로 꼽은 네 가지 핵심 주제는 ‘국민국가(nation-state)에 그치지 않는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 ‘94%에 이르는 한족을 중심으로 한 인종(race)’, ‘조공국가(tributary state) 체계’, ‘오래 지속된 통일(unity) 국면’이다. 결론에서는 이 네 가지를 중심으로 중국의 여덟 가지 모더니티-문명국가, 조공국가 체계, 인종과 종족성(ethnicity)에 대한 중국인의 독특한 태도, 대륙 크기의 넓이, 독특한 정체(政體), 농촌 개혁의 속도, 공산당 체제의 통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특징들을 결합-를 적시하고 있다.(Jacques 2009, 417-27)

마틴 자크의 주장을 비판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서양화(westernization)를 근현대화(modernization)와 동일시하고 개발도상국이 발전하면 서양식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서양 보편주의, 따라서 예전에 일본을 그 일원으로 받아들였듯이 중국도 어느 시점에 ‘책임감 있는 일원(a fully-fledged member)’(Jacque 2009, 12)으로 받아들인다는 서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마틴 자크는 이런 서양인들에게 이제는 서양과 역사`문화적 맥락이 다른 중국의 특수성에 주목할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몽골의 서정 이래 서양에서는 강대한 중국에 대한 위협을 ‘황화(Gelbe Gefahr)’로 유비한 바 있다. 자크는 중국 전문가답게 21세기 황화에 대해 중국적인 ‘지피지기(知彼知己)’의 대응방식을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이 중국 중심주의(Sino-centricism) 편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혁개방 이후 오랜 화두였던 ‘전통과 근현대화’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이제 ‘다양한 근현대화의 성과를 수렴한 전통’으로 모아지고 있고 그 성과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중국 내적으로는 ‘문화민족주의(cultural nationalism)’(임춘성 2008)로, 대외적으로는 ‘글로벌 차이나(global China)’(이종민 2007 참조)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베이징올림픽과 상하이엑스포를 ‘문화민족주의의’의 토대 위에 ‘글로벌 차이나’의 성과들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세계는 지금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전망이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신영복 2004, 163-4)이라는 진단은 제3의 가능성을 전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현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수용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사회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가능성은 무엇인지? 아리프 딜릭(Dirlik, Arif)의 도저한 낙관론과 중국의 새로운 주류이데올로기에 대한 왕샤오밍(王曉明) 등의 결연한 비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양자를 초월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Marx, Karl)적으로 표현하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변증법적 통일’이 될 것이고, 레이먼드 윌리엄스(Williams, Raymond)***식으로 유비하자면 ‘지배적인 자본주의’와 ‘잔여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새로이 ‘대두하는 제3의 길’이 될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술과 학문과 사회 간의 수평적 통섭****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류 앞에 ‘통제사회와 문화사회의 갈림길’이 놓여 있다는 심광현(2009, 60)의 용법을 빌자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수평적 통섭’의 과제이기도 하다.

 

* Leonard, Mark, 2008, What Does China Think?, HarperCollins Publishers, London; Mann, James, 2008, The China Fantasy: Why Capitalism Will Not Bring Democracy to China, Penguin Books, New York; Kynge, James, 2007, China Shakes the World-The Rise of a Hungry Nation, Phoenix, London; Gifford, Rob, 2007, China Road-A Journey into the Future of a Rising Power, Random House, New York; Burgh, de Hugo, 2006, China Friend of Foe?, Icon Books Ltd., Cambridge 등.

** 중국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와 투쟁한 저항적 경험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김희교), 친사회주의적 연구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희옥), 중국을 바라보는 반성적 시각으로서 ‘글로벌 차이나’(이종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야(perspective)’(백승욱),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황희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신영복) 등. 임춘성(2009) 참조.

*** 심광현의 요약에 따르면, 윌리엄스가 말하는 표의체계(signifying system)에는 언어, 사유와 의식의 체계, 이데올로기 체계, 특정한 형태로 표의작용을 하는 예술과 사상의 집합체들의 포함되며, 이는 단지 체계로서만이 아니라 반드시 능동적 활동과 정신 상태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어떤 ‘표의체계’가 어떤 사회체계들에 내재해 있고, 또한 사회체계들의 역사적 변형과 표의체계들의 역사적 변형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곧 오늘날 문화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문화연구’의 중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상 심광현(2009), 454쪽 참조.

**** 에드워드 윌슨(Wilson, Edward)의 『통섭』을 번역한 최재천과 달리, 심광현은 ‘통섭(consilience)’을 ‘함께 도약하기(jumping together)’ 또는 ‘더불어 넘나듦’으로 정의한 윌리엄 휴얼(Whewell, William)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 한자 표기도 統攝(“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다”-최재천)보다는 通攝(끌어당겨 서로 통하게 하다)으로 바꾸면서, 자신의 ‘비환원주의적’ 통섭을 최재천의 ‘환원주의적’ 통섭과 구분하고 있다. 이상 심광현(2009), 6쪽 참조. 이 글은 심광현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끌어당겨 서로 통하게 하다’의 의미를 살리려면, ‘통해서 끌어당기다’라고 읽히는 ‘通攝’보다는, ‘攝通’으로 표기하는 것이 의미론(semantics)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한 글]

신영복(2004),『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돌베개.

심광현(2009),『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사.

이종민(2007), 『글로벌 차이나』, 산지니.

임춘성(2008),「중국 문화민족주의의 최근 흐름들과 재현의 정치학」, 『문화/과학』54호.

임춘성(2009), 「한국 대학의 미국화와 중국 인식」, 『현대중국연구』11-1, 현대중국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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