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불멸의 루쉰

ycsj 2009. 6. 24. 22:20

불멸의 루쉰



    




 20세기 중국에서 루쉰(魯迅)은 불멸하다. 5`4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고 1930년대 좌익문학에서도 결락될 수 없다. 사회주의 30년 동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 초기의 금구를 타파하는 데에 루쉰 연구가 돌파구 노릇을 했다. 루쉰은 마오쩌둥(毛澤東) 식 혁명에서도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유용한 방법이 되었다.
루쉰의 삶과 정신 역정은 그 결과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20세기의 과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新)과 구(舊)의 갈등 속에 있게 하였고, 동서 교류라는 시대적 특징으로 인해 서양에 대한 지향과 배척의 사이에서 배회했다. 게다가 좌와 우의 극한적 대립은 후기 루쉰에게 선택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현실적 선택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는 경계인이었고 ‘역사적 중간물’이었다.
전 베이징대학 중문학부 교수이자 루쉰 연구의 권위자인 첸리췬(錢理群)은 루쉰 정신을 ‘반역’, ‘탐색’, ‘희생’으로 요약한 바 있다. 루쉰의 반역은 도저한 회의주의와 부정정신에 기초했고 그 탐색은 창조정신과 개방정신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루쉰의 희생정신은 그를 ‘중국혼’ 또는 ‘강골’로 추앙받게 만든 관건이었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에게 루쉰은 줄곧 화두였다. 다께우찌 요시미(竹內好)는 전후 일본의 무기력한 지성계를 타개하기 위해 루쉰을 가져왔고, 한국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와 신영복도 독재정권의 억압에 맞서면서 끊임없이 루쉰의 삶과 사상을 언급했다. 그뿐만 아니다. 한국의 중국 현대문학계에서 1990년대 초 이데올로기 금구를 뚫고 나올 때 선봉에 섰던 것도 루쉰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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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식 혁명과 근대 중국』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중국의 혁명적 지식인 루쉰 탐구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지금 여기’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집요하게 추궁한다. 여러 해 동안 루쉰에 천착해온 결과물인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루쉰식 혁명이 지닌 현재성의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루쉰의 실천방식인 ‘쩡자(掙扎)’에 주목한다. ‘필사적으로 싸우다’의 의미를 가진 이 말을 루쉰 실천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쩡자’했기에 ‘철로 된 출구 없는 방’에서 외칠 수 있었고 절망에 반항할 수 있었다. 루쉰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쩡자’했다. 그리고 ‘쩡자’의 근원에는 생명과 평등을 향한 인본주의적 가치 지향과 평민의식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평민의 시대는 혁명의 결과이다”라고 언명한 루쉰(「혁명시대의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천착하고자 하였다.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한 ‘지금 여기’에서 루쉰식 혁명의 의의는 무엇일까? 우리는 산문시집『들풀』에 나오는 ‘길을 가는 나그네(過客)’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형, 앞길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저 무덤(죽음)만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아가는 인간, 쉬어 갈 수 있으나 쉼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 그것은 시시포스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 길은 근대적 인간이 가야할 숙명적인 길이며 혁명의 비장감이 감도는 길이었고 루쉰의 길이기도 했다. 저자의 서술은 여기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루쉰식 혁명이 지닌 인문학적 성격, 혁명의 출발지로서의 개인, 혁명의 일상성 등을 논하고 있다. 전통에서 방법과 지혜를 빌어오되 현실의 지평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미래(이상)를 전망하되 현실의 지평에서 유연하게 사고하기 등을 ‘방법론’의 차원에서 기술하고 있다.
루쉰의 신화화를 경계하면서 방법으로서의 루쉰을 규명한 것은 이 책의 미덕이다. ‘지금 여기’ ‘폐기된 듯한 혁명’을 다시 논한 용기도 가상(嘉尙)하다. “근대의 모순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근대의 유일한 대안이자 근대인의 도피할 수 없는 숙명”(막스 베버)이라고 한다면 근대의 모순, 즉 중국 근대의 모순을 새롭게 조명하거나 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미흡하지 않았는가, 그 모순의 시대를 돌진해간 한 인간으로서의 루쉰의 모순을 남김없이 읽어내는 데는 다소 고의적으로 소홀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도 뒤따른다.
‘21세기로 걸어들어 온 루쉰’을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에 최근 몇 년간 학계가 시끄러웠다. 사라져간 혁명의 시대에 마오쩌둥과 루쉰이 계속 논의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평민의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