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베이징성과 상하이시에 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계절풍

ycsj 2009. 6. 24. 22:16

 

베이징성과 상하이시에 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계절풍

 

 

 

『중국의 두 얼굴』의 원제인 ‘성시계풍(城市季風)’은 의미가 심장하다. ‘성시(城市)’는 ‘성벽’과 ‘도시’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성’과 ‘시’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시’와 변별되는 ‘성’은 ‘성곽’의 성으로, ‘내성외곽(內城外廓)’의 준말이다. 서울로 보면, 사대문을 연결한 것이 내성이라면 남한산성은 외곽 또는 외성이 될 것이다. ‘성’과 구별되는 ‘시’는 ‘시장’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성’은 전통적 도시 형태를, ‘시’는 근현대적 도시 형태를 지칭한다.

중국의 북방과 남방을 대표하는 베이징성과 상하이시는 근현대 들어 자주 대비되곤 했고 많은 사람들이 경파-해파 논쟁 구도에서 두 도시와 사람에 대해 언급했다.(『상하이런 베이징런-중국인을 알 수 있는 눈』, 일빛, 2006 참조) 루쉰(魯迅)과 린위탕(林語堂), 저우쭤런(周作人)이 대표적이고, 최근 작가로 왕안이(王安憶), 이중톈(易中天), 룽잉타이(龍應臺) 등도 두 도시의 우열을 논했다. 800년 제왕의 도시 베이징에 비하면, 1842년 난징조약으로 개항된 시점의 상하이는 인구 10만을 헤아리는 어촌이었다. 그러나 상하이는 개항을 계기로 난징(南京), 양저우(揚州), 닝보(寧波),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등의 인근 도시들의 기능을 서서히 수용하면서 1930년대에 국제적인 도시 ‘대(大)상하이’가 되었고 1950년대 이후 공화국의 장자(長子)가 되었다.

저자 양둥핑(楊東平) 교수는 베이징성과 상하이시의 문화정신을 비교하면서 ‘근대’, ‘혁명’, ‘사람’, ‘시장경제’를 키워드로 삼아 역사적 고찰을 진행했다.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맥락에서 보면, 아편전쟁 이후 불어 닥친 서세동점은 첫 번째 계절풍이었고 쑨원이 이끌었던 국민혁명과 마오쩌둥이 지도했던 신민주주의 혁명은 두 번째 계절풍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계절풍이다. 이 책의 미덕은 전지구화에 직면한 베이징성과 상하이시의 변화를 기술한 점이다. 또한 베이징과 상하이를 언급하면서 광둥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최근 발표된 광저우-선전-홍콩을 잇는 광선강(廣深港) 고속철과 홍콩과 주하이(珠海) 및 마카오를 잇는 대교 건설은 주장(珠江) 삼각주 일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해서 ‘진주 바다’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는 분명 수도권 지역과 창장(長江) 삼각주 지역에 못지않은 문화`경제 구역임에 틀림없다.

도시를 거론하면서 그 속에 사는 사람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사람’은 도시의 영혼이자 도시문화의 주역이다. 호방하고 정치를 좋아하며 유머를 즐기는 베이징인과 실용적이고 개방적이며 규칙을 잘 지키는 상하이인이라는 대조는 ‘일반화의 오류’를 경계한다면 적용 가능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상하이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적인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마다사오’, 즉 장보기(마이차이買菜), 청소하기(다싸오打掃), 요리하기(사오차이燒菜)를 상하이 남성의 특징으로 거론하고, ‘소극적이고 완화된’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디댜오(低調)라는 용어로 ‘침착하고 세련된’ 상하이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마다사오’와 ‘디댜오’의 심층에는 상하이 여성의 정명(精明)함이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근현대적 대도시가 그렇듯이 베이징성과 상하이시에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이민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두 도시에 온 이민들의 정향(定向)은 각기 달랐다. 이전의 과거(科擧) 응시로 대변되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추구한 사람들이 베이징으로 몰렸다면, 상하이 이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몰려왔다. 베이징의 경우, 수많은 베이징 토박이(老北京)가 존재했기에 새로 온 이민이 기존의 베이징문화에 동화된 측면이 강했다면, 신천지 상하이는 ‘온갖 하천이 바다로 모여(海納百川)’ 새로운 근현대적 도시문화를 형성해갔다.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은 서양 상인들과 무역에 종사했던 광둥(廣東)인이었고, 뒤를 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닝보(寧波)인들이 몰려왔다. 전자가 상하이의 대외무역을 주도했다면 후자는 주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근현대 도시 상하이는 광둥 무역과 닝보 금융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안했다. 이들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뿐만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다.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금융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베이징은 자신의 외관을 일신했다. 상하이는 2010년 엑스포 준비에 한창이다. 이제 두 도시는 중국 내적 비교를 넘어 전지구적 차원으로 나아가 뉴욕, 빠리 등의 글로벌 시티와 어깨를 겨루면서, 중국의 부흥을 선도하는 주자로 나서고 있다.

 

脫亞入歐의 시대에서 脫亞入球의 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