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비판의 비판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신민주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인민공화국)이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주의로 진입한 것은 우리에게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비판’하며 건국한 인민공화국의 출현은 반봉건·반식민지 사회가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했다는 맥락에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사회주의 30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개혁개방 단계로 접어든 중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현재 중국을 사회주의 사회로 보기는 어렵다. 많은 학자가 ‘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 ‘국가 발전주의 모델’, ‘국가 신자유주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얼룩덜룩한 자본주의’, 심지어 ‘국가자본주의’ 등의 용어로 현재의 중국을 규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당-국가 체계(party-state system)’라는 명명은 중국 통치의 내부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국외에서 ‘관료 자본주의 국가이며 압축적 성장을 추구하는 개발주의 국가’로 평가되는 중국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많은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혐중론자들이 지적하는 노동 착취와 민주 노조의 부재, 공해와 소수자의 문제 등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에 공통된 문제다.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비판’하며 건국된 인민공화국은 개혁개방 이후 발생한 많은 문제점으로 인해 새로운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의 주체는 ‘비판적 지식인’과 ‘기층 민중’이다. 중국공산당(이하 공산당)이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의 기초로 삼았던 ‘기층 민중’과 연대의 주축이었던 ‘비판적 지식인’이 언제부턴가 공산당을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비판적 지식인’의 ‘비판’에 주목했다. ‘비판의 비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비판’한 공산당, 그리고 공산당을 ‘비판’한 ‘비판적 지식인’.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비판의 비판’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제한적이나마 ‘비판적 지식인’의 사상 계보를 정리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제에 대한 공산당의 ‘비판’과, 충분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비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이는 중국을 공정하게 인식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다.
이전 단계에 ‘비판적 지식인’은 주로 좌파 지식인을 가리켰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에 좌파의 존재 여부와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20세기에 좌파를 자처했던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지금 좌파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 존재 조건은 무엇인가? 혁명 좌파의 전위 정당이 ‘마르크스주의 학회’ 학생들을 탄압(천슈에이 2018)하고 좌파 학생들이 ‘중국은 사회주의인가?’라고 묻는(박민희 2020) 현재 중국에서 좌파 지식인의 존재 양상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누가 추궁하고 있는가? 중국은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이후 ‘중국적 사회주의’ 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70년 넘게 시행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 1989년 ‘톈안먼 사건’과 1992년 ‘남방 순시 연설’ 이후의 중국을 과연 ‘진정한 사회주의’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와 더불어 ‘일당전제’의 ‘당-국가 체계’에서 좌파의 존재 여부와 존재 방식은 관심의 초점이다. 이렇게 볼 때 ‘6․4 체제’의 공산당 내에서 좌파는 찾기 어렵게 되고 이른바 ‘신좌파’가 우리의 시선을 끈다. 하지만 ‘신좌파’ 또한 단일하지 않다. 왕후이는 ‘신좌파’라는 고깔을 달가워하지 않고, 간양은 ‘자유 우파’를 자처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비판적 지식인’에 관심을 두게 된다.
‘비판적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시간의 고험(考驗)을 견뎌내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초지(初志)를 잃지 않고 일일신(日日新)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상아탑에 머물며 전공 이외의 것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회적 실천을 빌미로 자신의 전공을 내던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전공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어설픈 사회적 실천은 또 다른 유혹일 수 있다. 유혹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또 하나 확실한 사실은 공부를 멈추는 순간 비판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당대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 첸리췬은 멘토인 루쉰과 스승 왕야오의 훈도에 힘입어 ‘정신계 전사’를 지향했지만, 그 기저에 ‘생존의 문제’와 ‘어느 시점에, 말을 해도 되는지,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지의 분수를 파악’하는 문제가 놓여있다고 털어놓았다. 첸리췬이 대표하는 중국 ‘비판적 지식인’의 존재 방식은 문자 그대로 지식인의 존재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첸리췬이 민간 이단 사상 연구에서 거론한 린시링, 린자오, 천얼진, 리이저, 루수닝 등의 존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민주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른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의 21세기 존재 방식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은 다들 일가(一家)를 이룬 사상가다. 이들 각자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는 별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각 인물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뽑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이를테면 첸리췬의 20세기 중국 지식인의 정신사와 민간 이단 사상 연구, 왕후이의 근현대성의 역설, 쑨거의 동아시아 인식론 등이 그것이다. 단 리쩌허우의 경우는 그가 포스트사회주의 시기 비판 사상의 시원이라는 점에서 종합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아울러 경제학자 원톄쥔의 백 년의 급진과 비용전가론, 정치학자 추이즈위안의 자유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장이빙의 마르크스 역사현상학 등도 함께 다루었다. 하지만 이들이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비판적 사상가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특히 비판 사상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왕샤오밍과 다이진화 등의 비판적 문화연구 학자들의 비판 사상은 별도의 독립된 저서에서 다룰 예정이므로 이 책에 포함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2.
우리 모두 ‘비판’을 운위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 이는 무지한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슬기로운 대응전략이다. 일반적으로 논쟁에서 상대방의 허점과 약점을 공격하다 보면 상대방은 방어 논리를 개발해 다시 반격해오기 마련이다. 그다음은 흔히 보듯 이전투구다. 그보다는 상대방 스스로 자신의 허점과 결점을 인식해 자신이 낙후되어 있음을 자인하게 만드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피지기해야 함은 물론이고,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설 내공을 갖춰야 한다. ‘비판’도 마찬가지다. 지피지기와 높은 내공을 토대로 한 ‘낙후’ 전략을 갖춰야만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
리쩌허우가 『비판철학의 비판』에서 시도한, ‘칸트와 마르크스의 교차적 읽기’에서 칸트와 마르크스의 주저 표제에 ‘비판’이 명시되어 있고, 리쩌허우는 그 ‘비판’을 다시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대상 텍스트의 충실한 독해와 컨텍스트 이해를 전제로 삼아야 한다. 장이빙은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라는 주장의 구체적 방법으로 ‘역사적 텍스트학’을 제창했다. 이는 “역사 자체의 시간과 공간 구조를 가지고 마르크스 텍스트의 본래적 맥락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이해의 결과를 얻어내”는 텍스트 분석을 가리킨다.(이 책 9장 2절 참조) 흔히 ‘비판’이란 명목 아래 임의로 재단(裁斷)하고 단장취의(斷章取義)하며 텍스트를 왜곡·날조하는 사례를 무수히 봐온 필자로서는 충실한 텍스트 독해와 폭넓은 컨텍스트 이해를 최우선으로 삼아 ‘비판적 고찰’을 진행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 “인간의 사고와 의사전달을 극도로 제한하는 진부한 고정 관념들과 환원적 범주들을 분쇄하는 것”(사이드 1996, 16)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지식인은 ‘제도들’에 어느 정도 ‘종속’되고 어느 정도 ‘적대적’인 이중성을 가지므로 철저한 비판정신을 가지고 동시다발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은 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데 이는 투쟁을 통해 현실을 변형시키는 주체가 현실에서 비판을 작동시킬 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변형과 변화는 개인의 차원에서, 나아가 사회의 차원에서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3.
돌아보니, 목포대 부임 첫해 한국연구재단(당시 학술진흥재단. 이하 재단)과 인연을 맺은 후, 네 권의 단독 저서를 모두 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간하게 되었다. 우선 감사를 표한다. 지둔한 사람에게 재단의 지원과 핍박은 동력과 활력이 되었다. 재단의 지원 덕분에 학계 동업자 및 타전공 학인과 교류할 수 있었고, 재단의 시한 덕분에 미룰 수도 있었던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재단의 관변적 성격을 우려하는 사람도 많지만 내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물론 재단 공모와 심사 과정에서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연구주제와 방향이 재단으로 인해 억압받은 적은 없었다. 아울러 계획서와 보고서를 읽고 내 연구주제가 지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해준 익명의 심사위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최근 내 공부는 ‘사이노폰 연구’ 세미나와 목포대학교의 ‘포스트휴먼’ 세미나 그리고 ‘적-녹-보라 패러다임’ 세미나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모두 내게는 새로운 영역이고 도전이다. 함께 하는 동도(同道)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연구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준 목포대학교에 감사의 말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2018년 9월부터 1년간의 연구년은 최종 원고를 마무리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또한 2018년 가을부터 반년간 머물렀던 타이중(臺中)의 중싱(中興)대학은 집중적으로 원고를 집필하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방문 기회를 마련해준 추구이펀(邱桂芬)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중화민국의 국가도서관 한학연구중심(Center for Chinese Studies)의 ‘타이완 펠로우쉽 프로그램’의 지원에도 감사를 표한다.
『루쉰전집』(2018)을 완간한 그린비와의 만남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12인 역자의 글 20권을 10년에 걸쳐 편집 출간한 저력은 학인들의 칭송을 받기에 손색이 없다. 출판사를 연계해준 유세종 선생과 출간 제안을 흔연하게 수용해주신 유재건 대표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임유진 주간과 편집부 홍민기 선생,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해준 김혜미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글들은 국내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았지만, 의미 전달이 어색한 부분은 원전과 대조해 필요할 경우 직접 번역해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호학자의 편의를 위해 번역본과 원전의 쪽수를 함께 적기도 했다. 번역비평에 참고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
코로나19가 1년 넘게 기승을 부리는 ‘새로운 일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년퇴직을 앞둔 시점에 내는 책인지라 비판적 중국연구 학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조심스럽다. 강호 제현의 아낌없는 질정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출처를 밝혀둔다. 일부 수정·보완했고, 4장과 5장은 각각 두 편의 글을 하나로 묶었다.
서장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사회 변동(『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4권 4호, 2017. 원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사회주의에서 포스트사회주의로)
제1장 문화심리 구조와 서학의 중국적 응용(『중국연구』 제67권, 2016. 원제: 리쩌허우의 ‘문화심리구조’와 ‘역사본체론’)
제4장 첸리췬의 20세기 중국 지식인 정신사 연구와 민간 이단 사상 연구(『문화연구』 6권 2호, 2018. 원제: ‘사회주의 개조’의 관점에서 고찰한 20세기 중국 지식인의 정신 역정: 錢理群의 ‘20世紀中國知識分子精神史三部曲’을 중심으로. 『중국현대문학』 제88호, 2019. 원제: 절망의 땅에서 희망 지키기―첸리췬(錢理群)의 ?1977-2005: 절지수망(絶地守望)?을 읽고)
제5장 왕후이의 ‘근현대성 역설’과 루쉰 연구(『중국사회과학논총』 창간호, 2019. 원제: 왕후이의‘모더니티에 반(反)하는 근현대성’과 ‘신계몽주의 비판’에 대한 재검토. 『중국연구』 제79권, 2019. 원제: 루쉰(魯迅)의 ‘개체성 원칙’과 ‘역사적 중간물’―왕후이(汪暉)의 『절망에 반항하라』를 읽고)
제6장 쑨거의 동아시아 인식론(『중국학보』제93집, 2020. 원제: 쑨거의 동아시아 인식론 비판)
2021년 4월 30일
임 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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