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의 『색, 계』(2): 두터운 텍스트, 『색, 계』
『색, 계』는 탕웨이(湯唯)의 데뷔작이다. 탕웨이는 최근 『만추』 김태용 감독과의 결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쉬안화(許鞍華) 감독의 『황금시대』에서 열연함으로써 전 세계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되었던 『황금시대』는 2014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천재 작가 샤오훙(蕭紅)의 삶의 궤적을 절제 있게 그렸다. 혁명으로 몸살을 앓던 1930-40년대 대륙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추구했던 샤오훙은 우리에게는 『생사의 장』과 『후란강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녀는 당시 중국인의 삶의 굴곡을 담담한 어조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루쉰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와서 보낸 시간은 고난으로 얼룩졌던 그녀의 삶에 훈훈한 온기를 더해준 바 있다. 배우 탕웨이는 바로 1940년대 최고 작가로 꼽히는 장아이링(張愛玲) 후기작의 여주인공 왕자즈(王佳芝)를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천재 작가 샤오훙을 연기한 것이다.
장아이링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리안의 『색, 계』는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다. 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텍스트라는 의미다. 『색, 계』의 두터움은 서사구조와 1940년대 중국의 정치 상황, 작가의 신변 이야기와 상하이 노스탤지어 등에서 비롯한다.
먼저 서사구조를 보면, 『색, 계』는 최소한 세 개의 이야기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에서부터 보면, 리안의 영화 『색, 계』,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 그리고 일명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이라 불렸던 딩모춘(丁黙村)-정핑루(鄭苹如) 사건이 그것이다. 오리지널 이야기는 미인계 간첩 이야기로, 이는 장제스(蔣介石) 정부와 왕징웨이(汪精衛) 정부에 관계된 국민당 내부 모순에 관련되어 있다. 원래 난징에 근거지를 두었던 장제스 정부는 일본 침략을 피해 충칭(重慶)으로 물러났고, 당시 중국 측 대화 상대를 찾던 일본은, 1927년 장제스의 4․12쿠데타에 의해 국민당에서 축출된 우파 왕징웨이를 찾아냈고, 그를 수반으로 삼은 괴뢰정권을 수립한다. 딩모춘은 바로 이 왕징웨이 정부의 정보 총책이었고, 실제 사건에서는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많은 한국인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공산당과 국민당의 다툼이 아니라 국민당 우파와 좌파 사이의 정보전이었던 것이다.
장아이링은 당시 왕징웨이 정부의 고위직을 맡고 있던 남편 후란청(胡蘭成)을 통해 이 사건을 전해 들었고, 후란청과 헤어져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가서, 후란청이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소설로 발표했다. 그녀는 「색, 계」에서 이(易) 선생과 왕자즈의 이야기를 모던한 ‘재자(才子)+가인(佳人)’의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 ‘재자+가인’ 모델에는 남편인 후란청에 대한 장아이링의 정서가 녹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안의 『색, 계』는 장아이링의 「색, 계」를 토대로 삼아 많은 공백을 메우고 있다. 주인공 이 선생(易黙成)의 이름에는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의 주인공 딩‘모’춘과 장아이링의 남편 후란‘청’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다. 이모청은 오랫동안 아무도 믿는 친구가 없었던 외로운 인물이다. 그는 어두운 곳이 싫어 영화관에도 가지 않고 손님이 적다는 이유로 맛이 없는 식당을 골라 다니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어내는 인물이고 동창을 처단한 후 애인과 밀애를 즐기는 그런 인물이다. 또한 리안은 여주인공 왕자즈에게 홍콩대학 생활을 가미해 홍콩대학 유학 경험이 있던 장아이링의 그림자를 투영시켰다. 영화로 개편된 『색, 계』는 장아이링의 원작보다 훨씬 정채롭다. 특히 클립형 체위 등 베드신은 대륙의 노출 수위를 넘나들었고, 국민당 내부의 모순도 그동안 다루기 어려웠는데, 그런 금구(禁區)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관객들에게 ‘금지된 것을 돌파하는 즐거움’도 선사했다.
똑같은 베네치아영화제 금사자상 수상작임에도, 『스틸 라이프』는 일부 지식인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중화권 관객의 반응은 냉랭했다. 『색, 계』와 비슷한 수준의 노출(noodle hair)과 금구(천안문 사건)를 다뤘음에도, 러우예(婁燁)의 『여름 궁전(頤和園)』은 당국으로부터 5년간 영화제작 금지 처분을 받았다. 왜 중국 대중은 『색, 계』에 환호하고, 왜 중국 당국은 『색, 계』에 관대한가? 과연 『색, 계』의 감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사랑의 진정성(authenticity)’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선생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 왕자즈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선생에게 ‘빨리 도망치세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 후과(後果)를 인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채석장에서 동창 5명과 함께 총살당한다. “여성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음도(陰道)를 통한다”는 장아이링의 언급을 남성이 체득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왕자즈가 다이아반지와 육체적 쾌락으로 표현된 이 선생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비해 『스틸 라이프』에서 돈을 주고 데려왔던 부인이 딸을 데리고 돌아간 지 10여 년 만에 모녀를 찾아 나선 한싼밍(韓三明)의 이야기는 진정성 면에서 왕자즈의 그것을 압도한다. 한싼밍의 이야기는 감동적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섹슈얼리티의 부재를 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리안의 『색, 계』는 섹슈얼리티로 넘쳐난다. 전통적인 ‘재자+가인’ 서사모델을 모던한 수준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드신 연출은 포르노 뺨친다. 그러나 『색, 계』의 섹슈얼리티는 인위적이고 깔끔하며 특이한 체위와 미장센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안은 한 인터뷰에서 베드신 촬영 작업에서 자신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배우와 카메라 감독은 그냥 연기하고 찍기만 하면 되지만, 자신은 이렇게 연기하고 저렇게 찍으라고 지시해야 했기 때문이었단다.
‘색, 계 현상’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국제적 공인 등이 중층적으로 교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국제적 공인의 배후에는 미국의 권위가 존재하고, 미국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은 감독에게 환호하는 것은 현 중국의 미국 숭배와 미국 상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문화민족주의 기제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색, 계 현상’의 배경이랄 수 있는 상하이 노스탤지어를 통해 그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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