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취향이라(그렇다고 해서 여기저기 신나게 싸돌아다닐 능력이나 처지도 못되지만) 그런지 나와는 다른 이색적이고 좀 생경한 장치나 배경이 나오는 설정이나 그림이 나오는 영화에 쉽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여행의 취향에서 내가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는 중국 남부의 운남성 일대나 베트남과의 국경, 혹은 미얀마와의 국경지대 같은 곳, 나라와 나라들이 접합되고 아날로그로 중복되며 이질적으로 만나는 그런 곳은 더더욱 호기심이 유쾌하게 발동된다. 더더군다나 그런 중층 이색지대를 관통해 보며 두세 나라를 돌아보는 기분은 또 어떨까? 그래서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앙코르와트를 보려고 태국국경, 아란에서 잠시 도보로 캄보디아의 포이펫으로 들어가 보았던 그 때의 첫‘순간’과 가슴 두근거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마치 사춘기 때의 그것처럼.
이런 취향에 따라 우연히 인터넷상에서 인상 깊게 발견된 영화는 중국 장가서 감독의 <붉은 강> (원제:紅河) 보고나서 검색해 보니 지난 해 여름 충무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영화로 뜬다. 어쩐지---. 만든 이가 장가서 감독이라고 하는데 문외한인 내가 잘 알 리가 없다. 간단한 해설로 그냥 2006년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 <빨간 버스>를 출시한 바 있고 1958년생으로 나와 있다.
영화는 제목처럼 홍하, 이른바 중국 베트남 국경선인 ‘홍강’을 주변으로 하는 목가적 화면부터 시작한다. 1975년의 천진무구한 베트남 소녀 아도, 아버지가 사다 준 연을 날리다가 그만 끈을 놓쳐 버린다. 벼논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그 연을 주우려 수풀 속에 들어간 가슴이 따뜻한 아버지, 그만 지뢰를 밟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딸의 위험을 피하려 스스로 발을 들어 폭파해 버린다. 그렇게 곁을 떠나간 아버지---. (명백히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이 민중들에게 전사된 현실적 트라우마를 상징한 그림이다) 그 후로 홍강 건너 중국 쪽 변두리 도시에서 유흥업소를 하고 있는 고모의 집에 위탁된 후 허드렛 일을 도우는 가정부로 성장한다. 세월은 흘러 아도가 15,6세의 준 청년. 우연히 이웃에서 하숙하고 있는 가라오케맨 노총각 아하(장가휘 분)를 알게 되고 그 집의 가정부로 대여(?)된다. 물론 이 장면은 그 남자와의 운명적인 로맨스의 시작이다.
단연, 흥미를 끄는 것은 장가서 감독이 풀어내는 유실인들의 아련한 로맨스 방식(삶)을 향한 독특한 시선, 최초의 사랑의 필을 받는 것은 성적인 주체적 정체성에서 모호하다. 아하를 보는 순간 아하의 이마에 박혀 있는 점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아하를 아버지라 호칭하며 따른다. 정확히 죽은 아버지, 같은 위치의 이마에 박혀 있던 까만딱지. 이성에 대한 감정이 상실된 부권의 추억과 혼재된 채 분리가 어려운 바로 그 병리적 지점에서 발생된다. 사실 어릴 때의 충격으로 모든 감각을 유치한 어리광이나 떼쟁이의 수준에서 퇴행, 고착시킴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도, 외상을 현실에 적응하고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정상인의 기준에서 보면 물론 정상인이 아니다. 제국적 질서로 인해, 불특정 다수 민중에게 전가된 폭력의 후유증---어떻게 보면 여전히 폭압과 저항의 심리적 기제에 고착된 채 자학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사회과학적 자아의 모습이 함께 떠오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성이라고 하는 성적 인간의 정상의 권위가 발전되지 못한 채 그렇게 결여의 주체로 유지되고 있는 전후 세대의 미결인간도, 아니 그러한 미결인 한에 그녀야 말로 바로 진정한 역사적 인간일까? 아도만이 아니다. 상대방인 43세의 노총각 아하도 사랑하는 애인을 우악스런 자본의 힘에 의해 빼앗기고 허름한 중고 가라오케 기계를 난장에다 설치해 놓고 지난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 역시 번듯한 가정을 꾸밀 자본이 없는 결여의 경계인, 즉 비 정상인, 그럼으로써 진정하게 그도 살아있는 인간이다.(창녀출신의 아도의 고모 아수, 흉터와 장애로 신체가 절단난 조폭두목 사파 또한 마찬가지다)
뭔가의 타자적 운명과 외압에 눌린 채 낮은 자들로 살아가는 무력한 주체인들, 오직 해석과 미적 렌즈의 도움으로만 ‘삶’으로 구원되는 이들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질감의 시선, 닳고 낡은 손 때, 아날로그적 풍광들을 잔잔한 서사로 펼치며 구슬들을 미려하게 꿰어매는 솜씨가 남다르다. 단순히 변경인들의 접합지대, 국경지대의 물리적 풍광들만이 아니라 그 물리적 공간을 호흡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삶의 지형들, 안속을 훑어주는 안으로의 여행---
자신의 운명에서 별로 주체적이지 못한 진정한 인간, 그 연약한 인간들의 사랑의 경험들은 어떻게 발전되고 심화될까? 설정들은 낡은 기찻길, 골목길들, 빛바랜 가라오케의 가요들처럼 촌스럽고 툭툭이처럼 서민적이지만 그 서민적 애잔과 삶의 묵직한 시간들을 관통하는 일관과 서사적 시선들은 영낙없이 뻘 물로 흐르는 홍강의 강물의 유속과 같이 친근하고 아름답다. 뚜렷한 정치적 함의도 사회과학적 목소리도 일말의 희화적 설정으로 배제한 채 오직 유실인들의 삶의 풍광들을 추적하고 있지만 영화는 무엇보다도 그럼으로써 정치적인 여운을 남긴다. 렌즈를 오직 변경인들의 애잔한 삶과 언어들에 맞추면서 역시 감독의 애정은 인민, 엷은 소시민들에 대한 강렬한 휴머니티에 두는 정치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불꽃튀는 눈빛이나 육체적인 섞임과 끈끈한 스킨십의 그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삶과 내면을 흔드는 사랑을 발전시키는,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을 포착해 담아내는 독특한 시선, 영상과 미술력 또한 미끄럽고 빼어나다.
마지막 장면, 홍강을 건너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도의 노랫소리, 가깝고도 가깝지 않은 중국과 베트남의 미묘한 심리적 거리를 상징해 주는 것일까? 그 물리적 장애 공간을 넘어 건너는 것은 오직 미결의 인간이 부르는 슬픈 노랫소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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