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국민국가의 신화와 일상생활의 복원

ycsj 2009. 6. 24. 22:45

 

국민국가의 신화와 일상생활의 복원

 

『20세기초 상해인의 생활과 근대성』배경한(2006) 엮음, 지식산업사.

 

1.

1920-30년대 중국의 자본주의와 상하이1)의 도시문화는 사회주의 중국 시기의 ‘숨은 구조(hidden structure)’로 억압되었다가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 부활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은 그 부활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전의 상하이, 특히 1920-30년대 상하이를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문화대혁명’의 ‘10년 동란’의 시기를 막 통과한 중국인에게 결핍되었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을 제공하면서 1990년대 이래 중국 전역을 풍미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 중의 하나이다. 장이머우(張藝謀)의『상하이 트라이어드』와 천카이거(陳凱歌)의『풍월』에서 발단한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은 이후 왕안이(王安憶)의『장한가(長恨歌)』, 신톈디(新天地)의 스쿠먼(石庫門), 헝산루(衡山路)의 카페 등으로 이어진다. 이제 라오상하이(老上海)는 부르주아 공간을 안전하게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박자영 2004, 99)과 결합되어 “시간경험을 변경시키고 역사성을 희석시키면서 유사 역사감각을 상기시키는 노스탤지어 현상”인 ‘상상된 노스탤지어(imagined nostalgia)’(아파두라이 2004)를 제공한다. 노스탤지어를 상기시키는 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도시민의 소비욕망을 겨냥한 상업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와 기억을 소비하는 상품으로 유통시킨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스탤지어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타자화(othernization)에 대한 ‘또 다른 기억’ 또는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다. ‘동방의 빠리’라는 기표에 가려진 소외된 계층의 존재가 그 주요한 측면이다. 외국인은 중국인을 타자화시키고, 중상층은 하층을 주변화시켰으며 남성은 여성을 억압했다. 해납백천(海納百川)으로 묘사되는 상하이의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주류와 지류가 존재했었고, 중심화에 따른 주변화가 진행되었으며, 양지의 이면에 넓은 음지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은 눈을 감고 있다. 거대서사에 대한 미시서사의 탐구, 정치사에 대한 생활사의 복원, 전통과 근현대2)의 중층성에 대한 고찰, 근현대성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 등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2.

『20세기초 上海人의 생활과 근대성』(이하『생활과 근대성』)은 그동안 중국 근현대사 방면에서 축적된 상하이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이는 ‘생활사’라는 각도에서 1920-30년대 상하이와 상하이인을 고찰하고 있다. 그 키워드는 ‘근(현)대성(modernity)’이다. 우선 엮은이의 안내를 따라 윤곽을 살펴보자.

우선『생활과 근대성』은 ‘근대성과 그 존재 양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근현대성을 “근대라는 시대를 지배해 온, 그리고 지배하고 있는 인식론적 틀과 사고방식, 정치 및 사회·경제적 제도, 생활방식과 관습 등에 나타나는 원리와 그 특성”(11)으로 파악하면서 “전근대적 공동체 질서로부터 벗어난다는 자유·해방의 측면과, 자본(자본가)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지배체제에 편성 종속되어 간다는 억압·구속의 측면이라는 양면성”(12)에 대한 성찰도 병행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 상하이인들의 생활 속에서 나타났던 근대성의 네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다양한’ 근대 지향적 변화들, 둘째, 해방의 측면과 구속의 측면이라는 양면성, 셋째, 전통과 근대의 차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보다 양자를 중첩적이고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할 측면들이 더 많은 점, 넷째, ‘식민지 근대성’이 가지는 약탈성과 불균형성(23-5).

기존의 정치사 중심에서 생활사에 주목한 것은 이 책의 소중한 시도다. 근현대라는 것이 국가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나마 전복하는 힘은 문화에서 비롯된다. ‘정치력/경제력/문화력 사이의 상대적 비중차이’에서 문화력이 왜소할수록 그 사회의 전망은 어둡기 마련이다. 국가권력과 시장의 대해(大海)에서 그에 저항하는 희망의 샘물을 긷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런 노력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생활사 연구가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다만 이 책은 ‘생활과 근대성’을 연결시키기보다는 근대성의 다양한 양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본론에 들어가기 전, 동아시아의 근현대에 대한 몇 가지 문제의식을 점검해보자.


        3.

우리는 그동안 서유럽3)의 모던 과정이 있었고, 동아시아를 비롯한 서유럽 이외의 사회는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 지역적 특수성을 가미해서 근현대 과정을 겪은 것으로 이해해왔다. 물론 모던이 우선적으로 서유럽에서 전개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간과되어 온 사실은 서유럽의 모던이 유럽 내부에서 순수하게 형성·발전한 것이 아니라 서유럽과 서유럽 외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발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Stuart Hall).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서유럽의 모던 과정을 여러 가지 모던 과정의 하나로 설정하고 서유럽 이외의 다양한 모던 과정을 고찰하는 일이다. 아리프 딜릭(Arif Dilrik)에 의하면, 그것은 서유럽 모던의 대문자 역사(History)를 비판하고 복수의 역사들(histories)을 복원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스튜어트 홀은 ‘서양과 그 외의 사회들’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서양사회와 비서양사회 사이의 관계들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를 검토한 바 있다. 그 주장의 핵심적인 출발점은 “‘서양’이 지리적이 아닌 ‘역사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서양적’이라는 말은 ‘발전된, 산업화된, 도시화된, 자본주의적인, 세속적인, 그리고 현대적인’이란 말과 통하는 것이고, ‘서양’이라는 개념 또는 관념은 ‘사고의 도구’, ‘이미지들 또는 재현(표상) 체계’이자, ‘비교의 표준이나 모델’, ‘평가기준 또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해석하였다. 이는 서양이 ‘그 외의 사회들’을 ‘타자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서양의 이른바 ‘모던’한 사회형태의 형성(formation)과 특징은 서유럽 내부로부터 틀지워졌지만, 이러한 형성이 ‘전세계적’ 과정이기도 했다는 점, 다시 말해 그 형성과정은 중요한 ‘외재론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결국 ‘서양’과 ‘그 외의 사회들’, 즉 이른바 ‘중심’과 ‘주변’은 이렇게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유럽과 동아시아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런 인식을 ‘역사적인 구성물’로 보는 것이 탈식민주의의 관점이다. 서유럽이라는 개념은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귀퉁이라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 등의 ‘그 외의 사회’를 타자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발명되었고(invented) ‘그 외의 사회’에 강요되었다.

‘포스트’학(postology)은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다. 서유럽의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출현은 모더니티의 역사 전제와 모더니티의 가정(假定)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불확실성이 출현했다.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만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변증법적 부정이면서 매 계기마다 모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지속(後 after)이자 변화(脫 de-, 超 beyond)라면 동아시아의 탈(후)근현대는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4.

국민국가(nation state)의 건설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중국 근현대에서 ‘근현대화’의 과제는 주로 국가의 몫이 된다. 그 과제는 도시의 공공교통, 공공사업, 위생, 교육, 자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고 행정기관 또는 민간단체가 그 주체가 될 수 있지만, 주요하게는 상명하달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상하이의 근현대적 재편 과정은 도로, 전기, 상수도, 위생 등의 공공영역을 “통치의 도구로 끌어들였다는 점”(95)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근현대화의 급변하는 과정에 대한 상하이 거주민의 입장에서의 대응이라기보다는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활 속으로 침투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1927년 7월 7일 상하이특별시 성립 당시 장제스(蔣介石)가 직접 상하이에 와서 행한 연설에서 “상해가 진보하는지 퇴보하는지는 전 중국의 성쇠나 국민당의 성패에 관련되어 있다”고 선언했다.(45) 1929년 1월에 수립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인 난징(南京)정부의 전단계로 볼 수 있는 상하이특별시의 성립은 뒤이은 ‘대(大)상하이계획’이 보여주듯 국민국가 건설의 시금석이었다. 성립 다음날 모든 기관들을 합병하여 9개 국(局)을 만들어 정부의 관리 기능을 집행하기 시작한 상하이특별시는 공공영역과 민간영역에서 도시 근현대화 과정을 통해 상하이인들의 심리와 인식의 변화를 주도해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명시설과 상수도망 등 도시 공공시설 분야의 근대적 변모에 대한 고찰을 통해 얻은 다음의 중간 결론은 이런 사실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상해의 외국인 거류민들이 공공사업을 운영한 뒤 상해인들이 보여준 심리상태 변화를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에 대한 상해인의 인식이 피동(被動)에서 주동(主動)으로 끊임없이 심화되어 갔고, 상해 도시 근대화의 주류 의식을 이루어 갔음을 알 수 있다.”(54)

다시 말해, 조계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치욕과 굴욕의 증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근현대사의 엄격한 ‘훈련소’이자 서양 학습의 ‘학교’로서의 구실을 했던 셈이다. 상하이인들은 ‘몸으로 서양을 체험’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서구 식민주의자는 비록 객관적으로 상해의 일부 도시 공공사업을 근대화시켰지만, 그것은 분명 기형적 근대화였으며 거대한 약탈성을 동반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것은 상해 도시 공공사업의 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의 특징이었다.”(77)

YWCA,4) 잔질원,5) 유민습근소6) 등은 국가의 행정기관이 아니었지만, 그 맡은 바의 사업과 관리 기제가 공공사업에 가깝다. 특히 유민습근소의 경우 미셸 푸꼬의 ‘판옵티콘’을 연상케 하는 기율은 교도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민중을 계몽하여 ‘국민’으로 재탄생시킴으로써 국가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국민정부의 노력에, 국가가 파악할 수 없는 체제 밖의 존재로서 질서 수립에 최대의 위협이 되는 광범위한 유민집단의 형성은 상당한 위협이 되었”(356)다. 그에 대한 대책의 하나가 유민습근소의 설립이었다. 그 운영 구상은 유가적 윤리교육과 서유럽의 형법 관념이 결합되어 있었지만, “유민들을 기율에 적응하는 집단으로 포섭함으로써 신국민이 되는 갱생의 전망”(382)을 주려는 시도는, 출소자의 추적 관리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시 유민화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아마도 유민을 유민으로 남게 하는 사회체제의 변혁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신체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갖는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상해 사회의 근대성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382) 유민습근소에 대한 분석에서 당시 상하이를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고, 그 관리체제 속에서 “한쪽에서는 예치적(禮治的) 발상이 다른 한쪽에서는 시장사회의 현실에 적응하는 신체관리적 발상이 공존했던 것이 1930년대 근대 상해 사회의 현실”(382)을 읽어내는 것은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유민습근소 수용자의 출신지별 구성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총 2,231명 가운데 장쑤(江蘇) 출신이 1,407명으로 63%를 차지하고 있는데(363, <표2>), 이는 ‘습근소의 지리적 위치’(362)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하이에서 주변화되었던 이른바 ‘쑤베이인(蘇北人)’의 실상이기도 하다. 에밀리 호니그(Emily Honig)에 의하면. 쑤베이인이 상하이에 정착하려는 시도는 이미 자리잡고 있는 장난(江南)의 중국 엘리트집단과 외국 통제하의 시정부의 견제를 촉발했다. 쑤베이인은 중국 엘리트집단이 추구하는 모던하고 고아한 정체성에 위협이 되었고, 상하이 공부국은 그들이 이 통상항구의 모범 거주구라는 지위에 손상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 중외 엘리트들에게 쑤베이인은 외인 또는 객민(客民)이었다. 좀더 구체적인 조사와 분석이 요구되지만, 상하이인의 정체성은 ‘닝보(寧波)인이 중심이 된 장난(江南)인이 쑤베이인을 타자화시키면서 형성되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앞의 영역들이 국가 권력이 국민의 생활 속에 침투한 측면이라면, 상업과 문화의 영역에서는 일정 정도의 자율성을 찾아볼 수 있다. 민국시기 상해 금융업의 어음 결산체계를 “관행적 질서가 제도적 질서로 이행해 가는 길”로 보고 “전통적 영역 내부에서 진행된 근대적 이행의 일례”(121)로 분석한 것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장의 논리와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근대성의 형성이라는 것이 결국 전통적 요소의 현실적 효용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주목하게 한다.”(122) 리쩌허우(李澤厚)의 ‘문화심리구조’를 연상시키는 필자의 성찰은 근현대성의 중층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본은 ‘이윤이 생긴다면 애비의 무덤도 판다’는 말과 같이 자신의 논리를 관철해나간다. 그 앞에서는 “친밀한 인간적 관계보다는 상업적인 관계와 이익이 우선시되었고, 밀집된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165)이 난무한다. 그리고 “상권의 전문화와 지역적인 분화는 도시 공간이용의 효율성을 높였지만, 한편으로 도시 공간을 계층화하고 위계화하면서 지역 발전을 차별화시키고 불균등 발전을 더욱 심화시켰다.”(165) “상해에는 개방성과 지역사회의 ‘동질적 응집’이라는 양면성이 존재했다. 이 둘의 결합이 상해에 다원성을 부여했고, 동시에 계층 갈등 또는 동향 집단 사이의 경쟁이란 의식을 부여한 반면에, 나아가서는 상해인으로서의 응집력도 부여했다. 그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과는 다른 ‘상해’에 사는 사람들이었다.”(166)

결국 1930년대 상하이의 상권의 특색은 서유럽의 모방과 추종으로 외연되는 식민지 근대성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주도한 중국인은 ‘공공조계에 거주했던 중상층’(167)이었다.


        6.

도시민의 생활은 잡지와 영화 텍스트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생활주간』을 통해 근현대성을 고찰하는 시도는 소중하다. 그동안『점석재화보』,『양우』등의 잡지가 중국현대문학계에서 활성화되고 있고『만상』의 경우에는 베이징대학 박사학위논문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생활주간』은 “진보적인 고급 교양 잡지의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통속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전통적 가치를 재해석함과 동시에, 신구(新舊) 생활양식의 조화를 탐색함으로써『생활주간』은 ‘전통’의 긍정과 그 지양(止揚)을 모색했다.”(174) 아울러 이 잡지는 ‘물질문명에 대한 숭배와 경계의 교차점’에 놓여 ‘시대적 고뇌’를 안고 있던 1930년대 상해인의 생활상과 정체성을 고찰하기 위한 훌륭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 텍스트의 분석에서 필자는 ‘지식과 인간 그리고 직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 ‘돈과 부에 대한 집착’, ‘근대적 개인’의 출현, 신여성의 등장과 가부장적 질서의 재해석 또는 부정 등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상하이에서의 ‘근대적 개인’에 대해 “본래의 함의보다는 예교질서를 대체하는 생활방식과 모던 지상적 생활양식을 옹호하는 논리로 해석되어 성찰 없는 근대 편향을 조장”했다는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근대적 개인의 굴절된 해석이자, 분명한 오독이었다. 그러나 그 굴절이 자체로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일상의 영역에서 상해인의 근대가 또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220) ‘성찰 없는 근대 편향’과 ‘굴절된 근대’의 흐름 속에서 미약하나마 ‘서구의 상대화’ 탐색이 진행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영화는 오래된 제왕의 도시 베이징에서 탄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조계시대의 상하이에서 흥성했다. 자신의 성장에 적합한 토지에서 상하이는 중국영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 중국영화사는 상하이영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현대도시, 이민도시, 국제도시, 상공업도시, 소비도시 등의 표현은 영화산업 발전의 요건을 설명해주는 명칭이기도 하다. 영화가 상하이로 인해 입지를 확보하고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면, 상하이는 영화로 인해 근현대화를 가속화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상하이의 영화산업은 상하이 나아가 중국 근현대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영화의 유통과 소비는 상하이의 경제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참고로, 중국 근현대문학의 비조 루쉰(魯迅)도 상하이 시절 택시를 대절해서 영화감상을 즐겼다. 반제·반봉건의 기수이자 엄숙문학과 진보문화의 상징이었던 그가 즐겨본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국주의의 대명사 할리우드의 ‘타잔’ 영화였다고 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성적 차원의 비판과 정서적 차원의 향유라는 이중적 잣대를 루쉰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저항과 통합의 타협적 평형(compromise equilibrium)’의 장(場)으로 파악한 그람시의 통찰을 염두에 둘 때 1930년대 영화를 대표로 하는 상하이 대중문화의 지형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앞에서 본《생활주간》분석은 이 지점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최근 지속되는 교육부의 개혁드라이브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관의 통제력 강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정량(定量) 평가 위주라는 점에서, 나아가 주무부서 구성원의 개혁 의지의 불균등성이라는 점(담당자가 바뀌면 개혁의 내용이 바뀌는 것) 등에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육인적자원부의 인센티브 전략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을 잿밥과 떡고물에 눈멀게 만들었고, 이제 BK, NURI를 대표로 하는 사업은 대학 통제의 새로운 방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1920년대 상하이의 대학 상황을 보노라면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음을 느끼면서, 학교를 교회와 함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명명한 알튀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게 된다. 1920년대의 상하이의 대학의 ‘실용교육을 중시하는 운영방침’을 보자. “인문교육보다 실용교육을 강조함으로써 대학들은 상해라는 도시에 적응해야만 했다. 후발 대학일수록 그와 같은 필요성은 더욱 컸다. 영어교육을 강조하고 상과를 비롯한 실용학과를 개설함으로써 학생들을 안정적으로 모집하고, 다른 대학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상해의 도시화·근대화에 필요한 전문적인 인력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304) 21세기 한국의 대학의 운영방침과 대동소이할 것으로 보인다.

외국어 학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선진적인 일본을 배우려는 상하이인들의 근현대성 지향은 배일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재학시절 ‘반미’ 데모를 하다가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가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7.

주어진 시간과 지면에 맞추어 주마간산 격으로 쓰다보니 필자들의 소중한 연구과정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덕분에 1920-30년대의 상하이에 대한 여러 방면의 견문을 넓힌 것은 글쓴이의 큰 소득이다. 공동연구에서 각 필자들의 주제의식을 하나로 모으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은 커다란 공통의 주제의식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도시화, 상공업, 문화, 공공성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교통, 공공사업, 위생, 어음 결산 관행, 상권, 생활문화, 영화산업, 기독교여청년회, 대학, 외국어, 자선, 유민습근소 등의 다양한 방면에 걸쳐, 근현대성의 양면성 내지 중층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은 ‘근대성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라는 취지에 충분히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사회의 편린(片鱗)이랄 수 있는 분야에서의 정치한 분석을 통해 전체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정치사가 거대서사라면, 생활사는 미시서사라 할 수 있다. 엮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활사 연구를 언급했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생활사와는 얼마간의 거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생활사에 주목한 것은 소중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상하이의 근현대적 재편 과정이 위로부터의 근현대화였고 그것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상하이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침투해가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생활 속에 구현된 근현대성’의 측면이 부각되었더라면 생활사적 접근과 근현대성의 주제의식을 결합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사족으로 덧붙여본다.


    관련 문헌

김태승(1997),「近代上海의 都市構造--人口構成과 空間配置를 중심으로」,『역사학보』155.

김태승(2001),「민국시대, 上海人 의식의 형성과 시장체제」,『중국학보』제43집, 한국중국학회.

노정은(2004),「1930년대 상하이인의 도시 경험과 영화 경험」,『중국학보』제50집, 한국중국학회, 서울.

박자영(2004),「上海 노스텔지어: 중국 대도시문화현상 사례와 관련 담론 분석」,『중국현대문학』제30호,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서울.

유세종(2005),「식민지 상하이와 탈식민지 상하이의 비주류, 여성-魯迅雜文,『쑤저우허(蘇州河)』,『죄값(孼債)』을 중심으로」,『중국현대문학』제35호,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서울.

이병인(2006),『근대 상해의 민간단체와 국가』, 창비, 서울.

임춘성(2006),「이민과 타자화: 상하이 영화를 통해 본 상하이인의 정체성」,『중국현대문학』제37호,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서울.

전인갑(2002),『20세기 전반기 상해사회의 지역주의와 노동자 - 전통과 근대의 중층적 이행』,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울.

정문상(2004),『중국의 국민혁명과 상해학생운동』, 도서출판 혜안, 서울.


1) 이 글에서는 중국어 고유명사 표기를 「외래어 표기법」(문화체육부고시 제1995-8호, 1995.3.16)을 따랐다. 인용문은 저자의 표기를 존중했다.

2) 이 글에서는 ‘서유럽의 modern’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를 설정했다. 자세한 것은 임춘성(1997),『중국근현대문학운동사』, 한길사, 서울, 10쪽 참조.

3) 우리가 자주 쓰는 ‘서구(西歐)’는 ‘서구라파(西歐羅巴)’의 약칭이다. ‘구라파’는 중국어에서 ‘유럽(Europe)’을 음역(音譯)하여 ‘歐羅巴(Ouluoba: 어우뤄바)’로 표기한 것이다. ‘유럽’과 ‘어우뤄바’의 음가에 관계없이, 중국인들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약속하였고 그래서 상호 의미 전달에 별 하자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한자만 들여와 우리식 한자음으로 독음하고 있다. 우리는 자의적 약속이 아니라 ‘추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 ‘서구’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고 싶지 않을 것이지만, 너도나도 ‘서구’라고 쓰는데 나 혼자 굳이 ‘서유럽’이라고 쓰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이 ‘통념의 힘’일 것이다. 서양 각국의 이름도 마찬가지 경로로 우리에게 수입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몰주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4) 여청년회의 활동 내용이란 것이 대부분 체제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었고, 지도부의 상당수는 사회 상층 인물과 저명 인사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여기에 조계라는 지배구조에서는 기독교를 매개로 여청년회의 지도층과 서양 자본가, 정치가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 네트워크는 … 여청년회의 기금 모집에 서양의 많은 은행이나 기업, 정치가들이 참여하는 데서도 나타난다.(281)

5) 사단 관계망으로써 상해의 도시 특성을 파악, 그 존재 양태와 특징에 접근(22).

6)‘근대적 국민국가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유민들을 신국민 곧 근대적 국민으로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는가’(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