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융-김용

『사조영웅전』을 읽는 몇 가지 방법

ycsj 2010. 2. 6. 13:31

『사조영웅전』을 읽는 몇 가지 방법

 

 


 

      1.

어떤 작가의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텍스트가 ‘독자의 기대시야’를 다양하게 융합하고 있다고 보는 수용미학의 관점이 그 하나이고,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도 다양한 해석(interpretation)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김용(金庸, Jin, Yong)의 소설은 단순한 통속소설에 그치지 않고, 다원적인 독자의 기대시야를 다양하게 융합하고 있는 ‘두터운 텍스트’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식민지 홍콩(香港, Hong Kong)에서 싹을 틔워 분단의 땅 타이완(臺灣, Taiwan)을 휩쓴 후 1980년대에는 역으로 대륙(Mainland)에 상륙한 김용의 무협소설은, 문화대혁명 이후 새로운 것을 갈망하던 수많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계몽의 목소리를 높이던 많은 지식인들도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김용 현상’이라는 문화 신드롬을 야기시켰다. 기본 구성에서도 그의 소설은 대부분 명확한 ‘역사 배경’과 ‘강호의 상황’ 그리고 ‘인생 이야기’라는 세 가지 기본축을 가짐으로써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있다.『사조영웅전』을 대상으로 몇 가지 독법(讀法)을 시도해보자.


      2.

하나. 역사의 허구화와 허구의 역사화. 대부분 구체적인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김용 무협소설의 커다란 특징이고, 왕조 교체기라는 과도기를 선택한 것은 작가의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우리는『사조영웅전』을 통해 송과 금의 남북 대치, 사막에서 성장해가는 몽골 부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용은 역사를 형해화된 모습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와 결합시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몽골 사막의 역사 영웅 칭기스칸의 인간적인 삶의 면모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역사를 허구(虛構, fiction)와 결합시킨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화산논검 등의 허구적 이야기는 소설 전체를 규정하는 배경이 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사실’로 느끼게 만들고 있다.

둘. 화산논검의 전통과 건곤오절(乾坤五絶)은『사조영웅전』의 강호 배경을 구성한다. 화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오경(五經)에서는『춘추(春秋)』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화산논검은 ‘역사 평가’라는 함의를 가지게 된다. 1차 화산논검의 직적접인 동기가『구음진경』으로 야기된 강호의 혼란을 막고자 함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역사 평가’라는 의미는 보다 확고해진다. 화산논검의 주역들은 당대 고수중의 고수인 건곤오절이다. 동사 황약사는 사악하면서도 바름을 가지고 있다. 서독 구양봉은 독랄하지만 자기 나름의 기준과 절제를 가지고 있다. 남제 단황야(훗날 일등대사)는 존귀한 황제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필부(匹夫)의 모습을 보여준다. 북개 홍칠공은 개방의 방주로서 호방한 성격과 대의명분을 추구한다. 그리고 중신통 왕중양은 전진교(全眞敎)를 창시한 실제 역사 인물이다. 이들은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강호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셋. 대협(大俠)의 성장 과정.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는 신세대 영웅인 곽정과 황용의 성장 이야기다. 역사와 강호는 이들의 성장 과정 및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계되면서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바뀐다. 성실하지만 우둔한 곽정과 영민하고 총명한 황용의 만남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몇 번을 읽어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주인공 곽정과 반면 인물 양강의 이름은 ‘정강의 치욕’(靖康之耻)을 잊지 말라는 취지에서 구처기가 지어준 이름이다. “남들이 한 번 하면 나는 열 번 한다”는 ‘자신을 아는 밝음(自知之明)’과 굳건한 의력(毅力),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행한다(知不可爲之而爲之)”는 정의(正義)로움․멸사봉공(滅私奉公) 등은 곽정의 성격을 형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무술 수련 과정에서 초기에는 거의 진전이 없다가 ‘항룡(降龍) 18장’을 익히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모습은 김용의 또다른 특색인 ‘무공의 개성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흡사 항룡 18장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어눌하고 순박하지만 우둔하고 치졸한 아이가 대협으로 성장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사조영웅전』의 ‘평범한 영웅’의 이야기인 셈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자가 대협(爲國爲民 俠之大者)”이라는 말은 곽정에 대한 적절한 평어라 할 수 있다.

넷. 지고지순한 사랑, 다양한 내공의 사랑. 곽정과 황용의 성장 과정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어쩌면 작가가 꿈꾸었을 법한 두 사람의 만남은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는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들을 현실 생활에서 이탈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쟁 공주와의 혼인 문제는 곽정의 성장 과정에서 너무나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것이었고, 황약사와 강남칠괴의 갈등은 쌍방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그 필연성을 보장받고 있다. 그로 인해 곽정과 황용이 겪는 위기는 현실에서 괴리되지 않고, 그 위기를 겪는 과정은 우리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의 ‘새로운 경지를 체험(更上一層樓)’시켜 주게 된다.『사조영웅전』의 속편이기도 한『신조협려』에서, 곽정과 황용은 양양성을 지키다 순국하게 된다. 성 함락 직전 황용은 곽정에게 탈출을 제안하지만 곽정은 의연하게 백성과 함께 할 것을 선언한다. 이 때 황용은 곽정에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하면서 함께 순국한다. 대협 곽정의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곽정의 지기(知己)이자 반려(伴侶)로서의 황용, 그리고 두 사람이 개인적 차원의 애정을 공동체의 운명으로 승화시킨 최고 경지를 보여준다.

진현풍과 매초풍 또한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어떤 연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황약사의 아내 사랑, 단황야의 유귀비에 대한 사랑, 영고와 주백통의 사랑 등은 사랑에도 장기간에 걸친 내공(內功) 수련이 필요함을 알려주고 있다. 그밖에도 목염자의 이루어지지 않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까지 곁들여지면서, 다양한 사랑의 양태를 보여준다.

다섯. 중국 문화에 대한 교양 입문서. 2천년이 넘는 시간과 광대한 대륙의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신고(辛苦)를 통해 이루어진 중국의 문화. 13경으로 대표되는 철학, 25사의 역사, 당시(唐詩)와 명청 소설 등의 문학, 그리고 서화(書畵), 바둑, 음악, 의술, 다도(茶道)와 주도(酒道) 그리고 음식 등의 문화는 우리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중국의 문화 전체가 김용의 작품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지만, 중국 문화 입문에 유용한 경로가 김용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베이징(北京)대학 진평원(陳平原) 교수는 중국 20세기 무협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인 맛’으로 ‘불교’를 꼽고는 그것 없이 무협소설은 한 걸음도 나가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학작품의 도움을 받아 불교를 초보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김용의 무협소설을 추천한다고까지 하였다.

『사조영웅전』에서도 모두(冒頭)의 설서(說書: 공연을 하듯이 청중에게 이야기를 하는 전통 장르) 장면, 전진교에 대한 이야기, 황용을 통해 소개되는 문사철(文史哲) 지식들, 칭기스칸과 악비(岳飛) 등에 관한 역사 사실 등 그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무공의 문화화’, 즉 무공에 문화를 결합시킨 부분이다. 이를테면 항룡 18장과『주역(周易)』의 관계, 공명권과 도가의 관계, 화교들이 2세 또는 3세를 교육시킬 때 김용의 소설을 교본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3.

이상의 독법은 두드러진 예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독자의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읽을 수 있다. 구처기와 강남칠괴의 18년에 걸친 내기 약속 등에서 볼 수 있는 사나이의 신의, 황약사의 기문팔괘와 일등대사의 일양지 치료 등을 통한 최고의 경지 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사시 전통이 부재한 중국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만한 영웅 사시로 보는 것도 그 한 가지 사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김용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연스레 중국 문화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중국인의 어떤 특성(Chineseness)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김용의 작품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손에 거머쥔, ‘아속공상(雅俗共償)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는 ‘문화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 이 글은 <<사조영웅전>>(김영사, 2003)의 부록에 <사조영웅전 깊이 읽기>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의 원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