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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중국의 빛과 그림자

ycsj 2009. 6. 24. 22:12

2008 중국의 빛과 그림자

 

2008년 지구촌의 최대 화제는 베이징 올림픽이다. 세 번의 도전 끝에 거머쥔 올림픽 개최는 중국에게 아편전쟁 이래 굴욕과 좌절로 점철된 근현대사를 딛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다. 그것은 최근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중화 대국의 부흥을 가능케 하는 국가적 욕망과 인민의 염원을 담은 프로젝트가 되었다. 냐오차오(鳥巢)라는 이름을 가진 주경기장 준공은 물론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 등의 문화예술 관련 건축물들의 완공은 이제 베이징 시티 투어의 노선을 바꿀 것이다.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스포츠 행사에 그치지 않고 중국 전통문화를 만방에 선양하는 기회로 삼고자 문화 올림픽의 기획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8월 8월 8시 8분 8초’. 중국인들이 행운의 숫자로 믿고 있는 8이 여섯 개나 중복되는 개막 일시는, 중국인들이 이 행사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주술을 걸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2008년 중국은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이한다. 서세동점 이래 구국과 부강을 위한 운동은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고, 1949년 신중국 건설로 새로운 도약의 단계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사회주의 30년은 또 다른 시행착오의 긴 시간이 되어버렸다.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현대화’의 실험은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무게와 위상도 제고되고 있어 전세계가 괄목상대하고 있다. 개혁·개방 30년 동안에 보여준 비약적인 발전은, 아편전쟁 이후 근 170년에 걸쳐 점철되었던 중국인의 좌절과 눈물을 위로하고 보상하는 데에서 나아가, 중화민족으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회복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중국은 이제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새로운 중국의 부흥을 도모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근대 이후 ‘하나의 중국’을 표방해 왔고, 베이징 올림픽 역시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同一個世界, 同一個夢想)’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지만 그 준비 과정을 지켜보는 내외의 시선은 하나가 아닌 복수다. ‘하나’를 강조하는 캐치프레이즈 이면에는 복수의 갈등과 복수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올림픽을 바라보는 시선, 티베트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 ‘개혁·개방’의 성공을 바라보는 시선, 중국경제 발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이미 도농 간의 갈등을 넘어 계층 간의 갈등, 빈부의 격차 등등, 결코 간단치만은 않은 수많은 사회적 욕망과 좌절과 불안의 시선이 교차하며 도사리고 있다.

중국은 갈등과 위험을 화해와 봉합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맞춤한 계기가 필요했으며, 그 전환점에 올림픽 축제가 하나의 기호처럼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새로운 문화 중국의 위상을 선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순탄치만은 않다. 티베트 시위와 그로 인해 야기된 올림픽 반대 선언이 장애물로 등장했고, 이는 각국에서 올림픽 성화 봉송을 저지하는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화 봉송 저지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해당 지역의 중국 유학생들이 그 시위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최소한 세 개 이상의 민족주의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올림픽으로 집중되어 있는 세계의 이목을 끌기 위한 티베트의 민족주의, 그것을 최대한 무화시키려는 중국의 중화주의와 해외 유학생들의 애국주의, 그리고 시위가 벌어지는 국가의 배외주의가 그것이다.

최근 올림픽 성화 문제로 불거진 폭력 시위를 통해 중국 유학생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4만 명을 바라보는 중국 유학생 규모의 실체를 인식하고, 성화 봉송을 호위하기 위해 6천-8천 명이 운집하게끔 만든 힘이 무엇일까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1870년 청나라가 ‘유학총부(留學總部)’를 창설한 이래 중국 유학생은 미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개혁·개방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급증하면서 유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980년 이후에 태어난 ‘바링허우(八零後)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중국 유학생들은 ‘유학보국(留學保國)’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붉은 악마’ 서포터즈와 비슷한 신인류의 행동 양태를 보인다. 그들은 이슈에 민감하고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그들에게 베이징 올림픽은 자부심의 근거다. 이들은 역사적 부채의식을 갖고 있지 않고 현재 대국으로 굴기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아편전쟁 이래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웅비를 하고 싶은 것은 국가적 욕망일 뿐 아니라 중국인 개개인에게 내재화된 욕망이기도 하다. ‘서울 올림픽 때 한국인은 어떠했는가? 월드컵은?’ 이라고 묻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한국 시민단체가 티베트 시위를 지지하는 것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약자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지구촌 축제인 올림픽 성화 봉송을 볼모로 삼는 것은 인질극 메커니즘을 내면화한 것일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의 약점을 위협하는 행위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부 구성원의 폭력 행위를 중국 유학생 전체에게 덮어씌우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1년 전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휘 사건을 접하면서 그것이 미국 내에서 한인 유학생들에게 파급되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아야 한다. 150년 만에 자국의 위용을 만방에 자랑하고 싶은 중국인 유학생의 마음을 일부 시위자의 폭력 행위로 덮어버리면서 ‘여기는 너희 나라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행위는, 폭력 시위를 일소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성숙함과 별개의 것이다.

이 지점에서 푸꼬(Michel Foucault)의 ‘담론 공동체’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경쟁하고 있는 담론-‘자유의 투사’와 ‘테러리스트’라는 담론-에 의해 생산되며, 그 각각의 담론은 권력을 놓고 싸운다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어떤 상황의 ‘진리’를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각국의 티베트 독립 지지 담론은 베이징 올림픽 담론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중국 유학생들의 애국주의 담론도 티베트 독립 담론을 억압할 수 없다.

올림픽 축제 준비 와중에 발생한 쓰촨(四川) 대지진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다. 1천 24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이재민을 발생시키고 아직도 여진의 위험을 안고 있는 대재앙은 그 정확한 원인이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개발로 인한 자연 변형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개혁·개방이 선부론(先富論)에 입각해 연해지역의 항구도시를 개방한 것이라면, 서부 개발 프로젝트는 개혁·개방의 성과를 내륙으로 확산시키려는 것이었고, 싼샤(三峽)댐 건설은 그 개발의 상징이다. 초대형 댐에 축적된 저수의 압력이 대지진의 원인이었다면, 그것은 개발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중국에게 올림픽이 빛이라면 대지진은 그림자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고 음지 없는 양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의 영전에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중국 정부와 인민들이 하루빨리 재난을 극복하고 베이징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