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명과 암

ycsj 2022. 5. 18. 07:05

한 가지 문화 전통이 다른 문화 전통에 의해 억압되어, 표면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숨은 구조’(hidden structure)의 형식으로 심층에 숨어 있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회복 내지 부활하는 현상을 근현대 전통의 부활’(the revival of the modern tradition)이라 명명할 수 있다. 192030년대 국제적 수준에 올랐던 중국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중국 30년 동안 숨은 구조로 억압되었다가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 부활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老上海懷舊熱)’은 그 부활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전의 상하이, 특히 192030년대 상하이, 올드 상하이(老上海)’를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전쟁혁명의 연대를 막 통과한 중국인에게 결핍된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을 상상으로 제공하면서 1990년대 이래 중국 전역을 풍미한 중요한 문화현상 중의 하나이다. 천쓰허(陳思和)는 이런 문화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개혁개방 이후 전개된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단계는 재미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천이페이(陳逸飛)의 회화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1984년 장쑤(江蘇)성 저우주앙(周庄)의 쌍교(雙橋)를 제재로 삼아 그린 고향의 추억(故鄕的回憶)과 상하이 여성을 그린 해상구몽(海上舊夢)심양유운(潯陽遺韻)등은 서양 세계의 애매한 동방 환상을 환기함으로써 상하이 및 인근 지역의 관광 붐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둘째 단계는 올드 상하이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다. 천이페이의 <인약황혼(人約黃昏)>(1995), 장이머우(張藝謀)<상하이 트라이어드(搖啊搖, 搖到外婆橋)>(1995), 천카이거(陳凱歌)<풍월(風月)>(1996)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대중적 확산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 영화에서 재현된 상하이 형상은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가 아니라 동방 상하이에 대한 서양 문화시장의 식민 상상에 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1995년 장아이링(張愛玲)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장아이링 읽기 붐이 일어난다(陳思和, 2003: 380). 회화에서 시작해 영화와 장아이링 붐에다가 와이탄(外灘), 신톈디(新天地)의 스쿠먼(石庫門), 헝산루(衡山路)와 우자오창(五角場) 카페 등을 더하면 1990년대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목록이 완비될 것이다. ‘서양 문화시장의 식민 상상에 영합하지 않는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라는 문제의식은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상업 시장에서 문학예술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천쓰허의 기본 입장인 문학예술과 대중문화를 변별하려는 이분법적 태도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에는 기억과 상상이 혼재하고 있다.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을 지구화와 지역성의 문제, 현상과 담론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고찰한 박자영은 지구적 현상으로서의 노스탤지어에 대한 담론들을 점검한 후, 올드 상하이가 부르주아 공간을 안전하게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해 1990년대 상하이 거주민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상상된 노스탤지어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박자영, 2004: 99). 개혁개방 시기로 진입한 중국인에게 자본주의적 물질문화는 사회주의 30년의 관행에서 보면 위험한 것이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욕망 대상이었다. 위험한 욕망 대상을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게 해준 기제가 상상된 노스탤지어라는 것이다. 이는 문화심리 구조 차원에서는 탁월한 분석이지만, ‘상상된 노스탤지어의 형성 주체를 밝히지 않고 중국인을 피동적인 향수 주체로만 간주했다는 점에서 미흡하다.

상상된 노스탤지어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가 제기한 개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심신이 아픈 상태란 뜻의 노스탤지어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주로 대중 광고에서 활용하는 전략인데,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상실의 경험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광고들은 상상된 향수imagined nostalgia’라고 불릴만한 것 다시 말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상상된 향수는 판타지의 시간적 논리(주체에게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날 법한 것을 상상하라고 가르치는)를 뒤집고, 단순한 선망이나 모방, 욕심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한층 더 깊은 소망들을 창조하는 것이다”(아파두라이, 2004: 140). 아파두라이는 대중 소비의 정치학의 맥락에서 노스탤지어를 고찰했다. 그는 우선 맥크랙켄(Grant McCracken)파티나(patina)’라는 개념을 끌어와 노스탤지어와 유행의 차이를 변별한다. ‘고색(古色)’이란 사전적 의미가 있는 파티나상품이 오래될수록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될 때, 그 상품을 그렇게 만드는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파티나는 오래되어 마모(磨耗)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손상(損傷)된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진품 골동(骨董)을 귀히 여기는 것은 상당한 관리를 요구하는 복합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칫 천박한 교양과 사회적 위선의 기호가 될 뿐만 아니라, 결핍의 기호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위조와 미숙한 취급에 열려 있다(아파두라이, 137). 그러므로 파티나는 바로 잡동사니와 변별되는 진품 골동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아파두라이는 파티나 없는 노스탤지어는 값싼 취향의 유행으로 그치기 마련”(아파두라이, 136)이라 단정했다. 특히 마모되는 시간을 함께 한 소유주가 특정한 삶의 방식이 상실되었음에 대해 가지는 미묘한 슬픔”(아파두라이, 138)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런데도 현대적인 판매 전략의 핵심적인 특징은 지나가버린 삶의 양식들과 물질들의 집합, 삶의 단계, 풍경, 장면 등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동원하는 것이다(아파두라이, 139). 하지만 판매 전략으로서의 노스탤지어 환기는 잃어버린 바 없는 것을 그리워하라고 가르칠 뿐, 감정의 환기는 아니다. 아파두라이는 이를 상상된 노스탤지어(imagined nostalgia)’라고 명명한다. ‘상상된 노스탤지어생생한 경험이나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향수라는 점에서 안락의자의 노스탤지어(armchair nostalgia)’(아파두라이, 142)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슨은 지구화(globalization)의 지속적인 흐름현재에 대한 노스탤지어(Nostalgia for the Present)”라고 묘사하면서, 사람들이 결코 잃어버린 바가 없는 세계, 특히 오락과 레저 부문에서 그리워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필리핀인들이 미합중국의 대중음악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좋은 예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에게 미합중국의 대중가요는 잃어버린 바가 없는 세계인 셈이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수준의 재생산에 대한 필리핀인들 특유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아파두라이는 잃어버린 바가 없는 세계기억과 무관한심지어 기억이 배제된 향수’(아파두라이, 55)라고 부연 설명한다. 노스탤지어의 상기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적 자본주의가 도시민의 소비 욕망을 겨냥한 상업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와 기억을 소비 상품으로 유통한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인은 부자의 꿈을 안은 채 공부를 하고 주식을 하며 부동산을 하며 살아간다. 이는 또한 사회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기억이 배제된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은 탈역사적이고 탈영토적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스탤지어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minority) 또는 타자화(otherization)에 대한 역사들또 다른 기억이다. 그것은 노스탤지어의 주체들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들이고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다.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의 구호에 가려진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동방의 빠리라는 기표에 가려진 소외된 계층의 존재는 후자의 주요한 측면이다. 조계와 이민의 도시 상하이에서, 외국인은 중국인을 타자화시켰고 똑같은 이민이면서 먼저 온 사람은 나중에 온 사람을 주변화시켰으며 중상층은 하층 타자를 소외시켰고 자유연애와 모던 신여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억압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시장은 혁명을 포섭했고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합했다. 어쩌면 1920세기 중국의 근현대 경험 가운데에서 경험이라면 진저리가 날 정도인 생존자들의 현실 과거에서 경험이 배제된 순수 과거가 생기게”(아스만, 2003: 15)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역사와 기억을 배제하다보니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설사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이외의 역사,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역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기억일까? 이런 문제설정(problematic)순수 과거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을 요구하게 된다. 그 작업은 때로는 기억을 위한 투쟁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기억의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거대서사에 대한 미시 서사의 탐구, 정치사에 대한 생활사의 복원, 전통과 근현대의 중층성에 대한 고찰, 근현대성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 포스트식민주의적 접근 등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억 또는 망각의 과정에서 현재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지휘하듯 과거를 지휘한다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로 하자. 역사와 기억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현재는 도래 가능한 것일까? 어떤 한 가지 역사와 기억을 복원하게 되면 그로 인해 새롭게 고통받는 개인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한편 한지은은 장소 기억의 심미화를 통해 부정적 차원이 희석되면 문화적 기호와 상징으로서 역사경관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상품화될 수 있다”(한지은, 2014: 9)라는 맥락에서 상하이의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을 고찰했다. 그녀는 사회주의 체제의 자본주의적 전환이라는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근대 시기, 즉 올드 상하이는 지우고 싶은 대상에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였고, 나아가 근대 역사경관은 도심재생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근대 역사경관의 노스탤지어가 도심재생에 이용되는 맥락을 크게 정치적경제적 영역과 상징적문화적 영역으로 구분하고, 도심재생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역학에 대한 제도주의적 분석과 장소 기억의 심미화를 통해 근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도심재생과 결합되는 과정에 대한 문화정치적 해석을 시도했다(한지은, 243). 흔히 사회주의 현대화로 포장되는 개혁개방을 사회주의 체제의 자본주의적 전환으로 이해하는 한지은은 올드 상하이의 식민지 역사경관이 사회주의 30년 시기에는 부정적인 극복의 대상이었다면, 포스트사회주의 시기에 들어 올드 상하이의 역사경관을 도심재생의 주요 소재로 삼아 장소 기억을 심미화함으로써 식민지 경험과 기억을 희석하고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변모시켰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그 맥락을 정치적경제적 측면과 상징적문화적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그녀에 따르면, “오늘날 상하이의 도심재생은 역사경관을 판매와 개발이 가능한 경제적 상품으로 전환하는 정치경제적 과정과 식민주의와 관련되어 있던 부정적 장소 기억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문화적 과정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므로 상하이 역사경관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 경제적 힘과 그 관계에 관한 포괄적 이해가 필요하다”(한지은, 21).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도시의 정치경제적이고 문화적 과정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노스탤지어는 지우고 싶은 식민시대의 기억장소를 다시 소유하고 싶은 전성기에 대한 열망으로 전환시킨다.

현대 소비주의의 열쇠를 쾌락으로 파악하는 아파두라이는, 소비자를 훈육하는 노스탤지어의 내재 원리로 순간성(ephemerality)의 쾌락’(아파두라이, 2004: 151)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층위에서 순간성을 안정적으로 포획하는 작업이야말로 노스탤지어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상품 광고가 노스탤지어를 활용해 소비자를 훈육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소비 주체의 몫이다. ‘순간성의 쾌락은 바로 소비 주체가 노스탤지어를 자기화하는 미학 기제인 셈이다. 그러므로 아파두라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순간성의 미학은 유연한 축적의 세련된 대응물이며, 상상력의 작업은 상품의 순간성을 감각의 즐거움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소비는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향수자본주의적 향수사이를 연계하는 핵심적인 고리가 된다”(아파두라이, 153). 사회주의 30년을 경과한 상하이인 나아가 중국인은 사회주의 이전 중국 자본주의 발전의 정점이었던 올드 상하이의 자본주의를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리워하는 시점이 사회주의 체제의 자본주의적 전환이라는 개혁개방 시기다. 이 두 개의 자본주의 시기를 잇는 것은 바로 소비가 불러일으킨 전성기로 되돌아가고 이를 다시 소유하고 싶은 회고적 열망(nostalgic longin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