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목포대와 민교협과 나

ycsj 2022. 4. 22. 07:57

* 이 글은 목포대학교 민교협 포럼(2021.12.15.)에서 발표한 같은 표제의 글을 수정․보완했다.

** 관련 동영상은 아래 링크 참조

​  https://blog.naver.com/csyim2938/222617498785

 

목포대와 민교협과 나 (동영상 + 발표문)

* 이 글은 목포대학교 민교협 포럼(2021.12.15.)에서 발표한 같은 표제의 글을 수정․보완했다. 목포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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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에 부임한 1993년은 종합대학교로 승격(1990)하고 목포시 캠퍼스에서 도림리 캠퍼스로 이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때는 좋게 말하면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계질서가 강조되곤 했다. 그 시절 ‘전임강사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담론이 있었지만, 목포대 민교협과 교수평의회의 활동 그리고 전국 최초로 시행된 총(학)장 직선제로 인해 학내 민주주의가 정립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1. 대학 교수: 연구와 행정

 

오래된 농담 한마디. 교수는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한 사람’과, ‘공부하기 위해 교수가 된 사람’! 대부분 교수가 후자에 속하겠지만 전자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100%는 아니지만 전자의 경우 대개 폴리페서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목포대 교수의 경우 사회 진출보다는 교내 보직교수의 길을 가게 된다. 총장과 학과장을 제외한 교내 보직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봉사와 영달(榮達)이 그것이다. 학처장 등의 주요 보직자들은 봉사를 내세우지만, 정교수 위의 직책으로 생각하고 일부는 총장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공부를 하기 위해 교수가 된 사람은 능력을 떠나 보직을 쉽게 수락하기 어렵다. 연구는 무엇보다 시간 확보가 최우선인데, ‘9 to 6’의 근무를 감내해야 하는 보직 업무는 연구에 커다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연구는 성과를 강요한다. 그러므로 성과물이 많은 교수를 ‘우수연구교수’라 칭하며, 성과물이 기준 이하인 교수들의 급여를 약탈해 그에게 ‘S급 성과급’을 지급하곤 한다. 서울 모 대학의 한 교수는 재직 중에 여러 차례 우수연구교수에 선정되었다. 그 교수의 논문은 정형화된 틀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어떤 시인을 골라 생평, 시대와 사상 배경, 내용 분석, 형식 분석, 결론으로 구성되었다. 대학원생들이 ‘붕어빵 장수’라 비판하곤 했다. 연구방법에 대한 고민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논문을 제조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1979년 중화서국(中华书局)에서 출간된 25책 『전당시(全唐詩)』에 시인 2,529명의 42,863수의 시가 수록되었으니, 만약 그 시인들을 일일이 연구해 논문화시킨다면 최소한 2,529편이 나온다는 얘기다. 이처럼 양적 평가 위주의 업적평가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맹점을 악용해 장사하는 학회가 국내외에 출현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연구와 관련해 언급할 것은 연구년 제도다. 대학마다 편차가 있지만, 흔히 6년 근무 후 1년(또는 3년 근무 후 1학기)씩 주어지는 연구년은 교학과 행정에 눈코 뜰 새 없는 교수에게 재충전의 좋은 기회다. 개중에는 자녀교육 또는 골프 타수 줄이기의 호기로 삼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연구년을 제대로 활용하면 교학과 행정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연구주제에 집중할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내가 근무하는 기간에 목포대는 연구년(해외파견 및 연구교수 등) 제도가 비교적 원만하게 운용되었다. 특히 2년까지 다녀올 수 있는 해외파견 제도는 운용하기에 따라 연구자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제도였다. 나는 운 좋게 네 차례의 연구년 혜택을 누렸고 그때마다 단독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년이 ‘교수업적평가’와 ‘교육․연구 및 학생지도비용’ 평가에서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해외파견 신청자가 줄어들면서 연구년 혜택을 받는 인원이 점차 감소하는 실정이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교원이 원하는 시기에 재충전할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년 제도를 잘 갖춰야 할 것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이 있다. ‘부정적인 의미의 끝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판승과 사판승을 교수 사회에 적용해 연구교수와 보직교수로 나누어 볼 때, ‘이도 저도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잘하면 좋겠지만,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분업이 필요하다.

요즘은 학교 행정도 간단치 않다. 특히 교육부 지원이 사업별로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업계획서 작성과 시행은 별도의 ‘공부’가 없으면 참여하기 어렵다. 대학이 흥성하려면 연구 실적도 좋아야 하지만 재정이 여유 있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판(理判) 교수가 제대로 공부하고 가르칠 여건을 만들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판(事判) 교수가 필요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장기 봉사의 자세로 대학 행정을 공부하는 것이다. 임명된 후 업무 파악을 시작해서는 임기 내내 업무 파악하다 마칠 수가 있다. 대내적으로는 행정 전문가인 직원을 리드할 수 있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교육부 정책을 숙지하고 그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구성원과 소통하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해내는 것을 기본 자질로 갖춰야 한다.

 

2. 학생 학술심포지엄

 

‘천하의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일’이 군자삼락의 하나라고 하지만, 그건 목포대의 현실과는 ‘다소(多少)’ 거리가 있는 말이다. 출발점은 초중고 12년의 입시교육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학생들의 수준이다. 그러므로 ‘눈높이 교육’이 중요하다. 물론 입시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영재를 발굴해서 육성하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논어』 「술이(述而)」 편에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조금 친절하게 풀면 다음과 같다. “학생이 마음속으로 통달을 구하지만 통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면 열어주지 않고, 말하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학생을 말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탁자 한쪽을 들어 그에게 설명하는데 다른 세 쪽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더는 그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통달을 구하려 분발(憤發)하고 공부한 것을 표현하려 애쓰는 학생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하나를 말해주면 셋을 들어 반응하는 학생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적어도 지방 국립대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기다릴 수만은 없다. 열심히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과 감동을 주고받으면서!

목포대 현실에서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자율적인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교수법을 창안하기 위해 많은 교수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학생 학술심포지엄 및 준비 세미나다. 목포대 부임 후 1년의 관찰 시간을 거쳐 심포지엄과 준비 세미나를 조직했다. 전임자들과는 교육 지향이 달랐기에 혼자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3월에 주제를 선정하고 희망자를 모집해서 4월부터 6월까지 주 1회 세미나를 진행하고, 여름방학 동안 각자 소주제를 결정해 개별 준비하고, 9월부터 본격적으로 발표문을 준비해서 11월 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지금까지 중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로 약 10회 진행했고, 2020년에는 <국립대학육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3월부터 8인의 학생과 함께 주 1회 세미나를 진행했으며, 그 결과물을 『중국어 영화와 페미니즘』(2020.12.2.)으로 발표했다. 2021년에도 <특성화 교육과정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4월부터 주 1회 ‘페미니즘과 5세대 영화’라는 주제로 학습을 진행하고 있고 그 결과물을 11월 11일 목포대 <인문주간> 기간에 발표했다. 학교의 지원은 커다란 힘이 된다!

공부하는 학생을 육성하는 심포지엄인 만큼 학과 교수의 협조체제가 필수적이다. 1학기 1과목 이상의 지도 부담이 있는 만큼, 1인이 계속 담당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연구년 등으로 1년 중단하게 되면 연속성이 없어지고 다시 조직하기가 어렵다. 자율적인 학습 분위기 확산도 쉽지 않았다. 매년 새롭게 팀원을 모집하다 보니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해도 있었다. 이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과 교수들의 공감대 형성과 긴밀한 협조 아래 심포지엄 준비 세미나와 심포지엄 발표를 정규과목(패스 과목)으로 개설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지도교수도 윤번제를 시행하면 좋을 것이다. 학과 전체로 확대해 졸업논문과 연계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일이다.

신입생 감소로 인한 구조조정이 코앞에 다가왔다. 취업 연계 전공 교육도 중요하지만 갈수록 험난해지는 성장사회에서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인문 근육’ 강화 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장기지속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할애하려는 교수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학생 학술심포지엄은 그 작은 하나일 뿐이다.

 

3. 학부제 파동

 

1993년 3월 목포대 부임 시 내 머릿속에는 ‘전국 최초 총장/학장 직선제 쟁취’와 ‘교수평의회’라는 단어로 꽉 차 있었다. 목포에 내려가 난이나 캐고 바다낚시나 다니지 말라는 서울 지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침 한국연구재단 연구과제 저술사업에 선정되어 약 2년 정도 눈코 뜰 새 없었고, 그런 와중에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단어가 한동안 뇌리에서 맴돌기도 했었다.

목포대 내의 인간관계가 총장선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재직 10년쯤 되어서였다. 3대 패밀리가 어느덧 5대 패밀리가 되고, 반갑게 대하곤 하던 선배 교수가 어느 날 무덤덤한 표정이 되는 것은 대권을 포기한 것이었고, 자주 밥을 함께 먹곤 하던 옆방 교수는 어느 순간 낯선 타인으로 변해버리기도 했었다. 지금도 교내 관계망의 핵심에 총장선거가 놓여 있음은 비단 목포대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관계망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봐줄지는 모르겠다. 아니, 루쉰의 「광인일기」에서처럼, 나는 그런 의지가 없었지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사람 고기를 먹었을’(喫人)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7대와 8대 총장선거 후보자 토론회의 사회를 맡은 것은 나름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삶의 반영이었다고 자부해본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 전 교수평의회 활동이 있었다. 조금 늦게 선출된 덕분에 부의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던 2001년도 제9대 교수평의회(김창대 의장, 배현 간사장)의 뜨거운 감자는 김대중 정부(이해찬 교육부 장관)의 학부제 개혁이었다. 상명하달식의 개혁으로 인해 교내 모순이 불거졌고 결국 대리전 양상으로 치달아, 당시 새로운 단계로 비약할 수 있었던 교내의 발전적인 역량을 소모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교수평의회는 논의의 핵심에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었나 하는 ‘회한’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2001년의 학부제 개혁 때 교육부의 정책을 놓고 교내에서 대리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주어진 조건에서 목포대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한쪽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면서 진정한 학부제, 학생들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자율적인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학부제’ 시행을 주장했고, 당연하게도 옥상옥의 단과대학 폐지를 주장했다. 다른 쪽은 그에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자의 주장이 관철되었지만, 2002년 시행 단계에서 신임 4대 총장은 학부제에 대한 아무런 제도적 뒷받침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학부제는 파행을 겪게 되었으며, 대학은 반목의 상처로 내구(內疚)하다가, 단과대학 복원이 5대 총장의 당면 과제로 설정되는 등 대학의 원기를 훼손시키고 말았다. 결국 2001년부터 2007년 단과대학 복원까지 약 6년간 목포대는 학부제 개혁으로 몸살을 앓은 셈이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진정한 학부제 개혁을 하자고 했지만 4대 총장의 미필적 고의로 위장된 방관으로 인해 흐지부지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총장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고, 당시 교내 문제로 답답해하는 소장 교수에게 술만 먹지 말고 ‘제대로 된 총장을 만들어 보라’라는 제언을 한 것은 그런 맥락이었다.

목포와 호남의 지역 특성이 있다. 목포대 갓 부임했을 때 느낌으로 서울의 어떤 흐름이 광주에 오는 데 2-3년 걸리고, 광주에서 목포까지 1-2년 걸린다. 요즈음은 그 기간이 단축됐겠지만 시간 간격은 여전하다. 그 이면에는 서울의 호남 타자화, 광주의 목포 타자화, 목포의 ‘섬것들’ 타자화가 존재하고 있다. 목포대 교수는 중앙에서 목포/호남 이외의 사안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물론 발언 자체가 막혀있는 것은 아니지만 발언이 합당한 대접을 받기 어렵다. 목포대 교수들이 한두 번씩 겪는 ‘목표대 교수’라는 오기는 타자화의 희화화라 할 수 있다.

2001년도 학부제 개혁의 교훈은, 목포대는 한국의 대학교육을 선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선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학부제 파동 이후 목포대는 이전처럼 다른 대학, 특히 인근 전남대 등의 행보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학부제 파동은 목포대 내부의 새로운 기상이 교육부의 구태와 교내 보수 세력에 의해 가로막힌 사례이다.

 

4. 민교협 활성화

 

1993년 3월 목포대에 부임해 오면서 들었던 느낌이 새삼 떠오른다. 7년간의 고단한 시간강사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가슴 설렜던 것은 ‘전국 최초의 직선제 총장’이라는 휘장(徽章)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온 나라가 민주화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던 1980년대, 그 대부분을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신분으로 보내야 했던 나로서는 해직의 위협을 무릅쓰고 시국선언에 서명하는 민주 교수의 모습은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가시적인 성과의 하나가 ‘총장직선제’였는데, 바로 전국 최초로 총장 직선을 쟁취한 대학에 내가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목포대 부임 당시 민교협에 대한 기대를 2002년에 회고한 것이다. 1993년 목포대 부임 후 거의 10년간 목포대 민교협은 교내 활동이 거의 없었고, 가끔 시국 사건이 있을 때 서명과 외부 집회 참석 수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93년 처음 부임했을 때, 누구도 나에게 민교협 활성화 과제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자연스레 민교협에 가입해 강사 시절 로망이었던 서명도 하고 철야 농성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가입을 권유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 1993년에 민교협 주최로 오세철 교수 특강이 있어서 참석했는데, 행사장인 사회대학 강당에 교수는 5~6인 정도였고 학생들만 가득했던 장면이 목포대 민교협 행사와 관련된 내 기억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포대 민교협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창호 교수와 박관석 교수의 양해 아래 분회장을 자임하고 2003년부터 2년간 민교협 활동을 주도했다. 이른바 ‘1차 활성화’다. 당시 민교협의 주요 활동은 토론회 위주로 진행되었다. 2003년 4월 25일 <참여정부 시대 ‘민교협’의 위상과 활동 방향>, 2003년 12월 2일 <교수평의회 17년(1987~2003) 역사의 회고와 새로운 위상>, 2004년 11월 11일 <글로컬라이제이션과 시민운동> 등이 그 주요 활동이었다.

2년 임기를 마치고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선배 교수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도 분회장 연임을 당연시했고, 나는 민교협의 문제점을 자각하면서 ‘다른 모임도 아닌 민교협에서 총회 없이 분회장을 연임할 수 없다’라면서, 2004년 11월 11일부터 몇 차례 총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의사정족수 미달로 불발되었다. 그 이면에는 이전 단계 ‘교내 문제는 교수평의회, 교외 문제는 민교협’이라는 역할 분담론과, 날로 제도화되어가는 교수평의회를 믿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민교협이 교내 문제에도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 사이의 대립도 존재했었다. 그 후 민교협 중앙에 ‘사고 분회’라 보고하고, 민교협 통장으로 자동 입금되는 회비 전액을 중앙에 전달하는 ‘회비 납부 모범 분회’ 역할을 약 7년간 수행했다.

그러던 차에 장시복 등 소장 교수들이 부임해 목포대 민교협 활성화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으며 외부에서도 그와 관련된 요구―젊은 교수들의 활동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를 우연히 확인했고, 그런 내부 희망과 외부 요구에 부응해 2010년 11월 새롭게 출발했다. 이른바 ‘2차 활성화’ 단계라 할 수 있다.

목포대 민교협은 개점 휴업 이후 정년퇴직과 몇몇 회원의 탈퇴로 회원 수가 감소하다가, 2차 활성화 이후 전국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신입 회원이 대폭 증가한 분회가 되었다. 양적으로 가장 활발한 분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활성화 이후 가입한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5. 총장직선제 폐지 파동

 

2001년 학부제 파동과 유사한 사례가 2012~13년의 ‘총장직선제 폐지 파동’이다. 교육부가 국립대 총장직선제 폐지를 추진한다는 말을 나는 상하이대학 방문학자 시절에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2001년도의 학부제 개혁 상황이 연상되었다. 상명하달식의 개혁으로 인해 교내 모순이 불거졌고 결국 대리전 양상으로 치달아 당시 새로운 단계로 비약할 수 있었던 교내의 발전적인 역량을 소모하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 우려를 당시 몇몇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전달했었는데, 결국은 2012년 3월 27일 교수회의 찬반투표부터 시작해 2013년 11월 20 총장선출규정 투표로 마무리되기까지 장장 20개월의 진통을 겪었다. 이는 6대 총장의 임기 후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교수평의회와 본부 그리고 대학 구성원들이 이 문제로 고심했다는 의미다.

사실 국립대 총장직선제 폐지 사안의 대국자는 교육부와 국립대였다. 그런데 목포대에서는 어느 순간 대국자가 바뀌었다. 총장을 필두로 한 본부와 교수 대의기구인 교수평의회가 대국에 임하게 된 것이다. 두 주체 모두 ‘학교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주장했지만, 그 길은 천양지차였고 결국 교수평의회가 ‘학칙개정처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제16대 교수평의회가 구성된 후에도 사안을 달리하며 지속되었고 결국 ‘총장임용추천위원회 규정’ 제정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한 것을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2001년 학부제 개혁 때 그랬던 것처럼 학내에서 대리전을 치른 것이다.

최근 민주주의에 관한 몇몇 논의를 검토해 보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히틀러의 파시즘도 선거라는 절차를 밟아 정당성을 획득했고, 스탈린의 공산 독재도 ‘민주 집중’이라는 절차를 밟은 것처럼 위장했으며, 박정희의 개발 독재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로 은폐되었던 사실들이 그 증거다. 민주화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삶이 어려운 상황은 ‘유감(遺憾)’이 아닐 수 없다. 정치철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은 정치적 실천으로서 민주주의의 어려움을 ‘도망치는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특정 시점과 상황에서 ‘이것이 민주주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져 버리고 또다시 도망치듯 달려 나가는 정황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지고지순의 원리라고 배웠고 그래서 수많은 선지선각자가 희생을 감수하고 달성하려 했던 민주주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실체가 있다면 민주주의의 역사 과정은, 민주주의의 변질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로 이해해야 하는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근대 민주주의가 인민민주 원칙을 위해 대의제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제는 인민민주 원칙을 억압하게 되는 역설이 성립한다고 하면서, 근대 민주주의 내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상이한 전통이 대립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무페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역설은 “자유를 위해서 인민주권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정당하다”라는 자유민주주의의 생각이다. 직선을 통해 선출된 총장과 그 총장을 선출한 교수들의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무페가 언급한 ‘민주주의의 역설’은 목포대 사례에도 유효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질문을 던져본다. ‘총장이 학교의 이익을 위해서 교수회의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다시 한번 교수회의에 물었으면 어땠을까? 총장의 우려대로, 교수회의가 다시 한번 직선제를 고수하고, 그 결과 2013년도 교육역량강화사업 지원을 다시 한번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조정 대상에 올랐을까? 아니면 교수들이 학교가 처한 상황을 총장만큼 절감하고 그에 따랐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몇 차례의 교수회의를 통해 표출된 대다수 교수의 의지는, 직선제를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할 수도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의지를 수렴해 제7대 총장선거를 원만하게 치른 것은 제16대 교수평의회의 공로다. 이런 의지를 조기에 적극적으로 수렴했더라면 20개월을 허송세월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001년의 학부제 파동과 2012-13년의 총장직선제 폐지 파동의 교훈은 교육부의 정책에 대해 교내에서 대리전을 치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주어진 조건에서 목포대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미충원으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지방대의 상황에서 당분간 생존을 위한 방략 마련에 절치부심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은 당연히, 한 개인의 고뇌 어린 결단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목포대 민주화 전통과 민주주의 원칙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