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온글

학살(虐殺)의 추억-블루 칼라

ycsj 2011. 6. 7. 23:50

[역사] 학살(虐殺)의 추억


2011.06.07.화요일

블루칼라

 

 

*이 글에는 잔혹한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으니 미성년자나 심약자는 읽지 말길 바란다. 구글링을 통해서도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사진들이지만 흥미를 위해 첨부한 것이 아니라 대량 학살의 처참함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니 아무쪼록 글의 의도를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지 서른 한 번째 날에도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수많은 생명이 무참히 죽어갔음에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누구 하나 그 학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그 역사에 대해 나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보름이나 지난 지금, 뒤늦게 학살(虐殺)의 추억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든 한 사내의 소식 때문이다. 뉴스 한귀퉁이로 취급되어 가카 치하에서 피곤에 지친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별다른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 작은 소식 하나.

 

라트코 믈라디치가 16년의 도피(?) 생활 끝에 검거됐다.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를 이끄는 사령관이었으며 UN이 지정한 안전지역인 스레브레니차에 4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최소한 8천여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내전이 종식된 후 16년 동안 전범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세르비아의 암묵적인 보호 아래 도주 아닌 은거 생활을 해왔던 자이다.

 

믈라디치가 저지른 대학살에 대해 이해하려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보스니아(정확한 명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보스니아는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 반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와 이해관계에 뒤엉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다.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는 가깝게는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땅으로 기억되지만, 역사적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비밀결사대 청년에게 암살당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당겨졌던 땅으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발칸 반도는 인도와 아프리카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선 유럽 열강들에겐 결코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고 그것은 결국 보스니아의 근대사가 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밑거름이 되어 버렸다.

 

보스니아는 내부적으로 무슬림인 보스니아계와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세르비아 정교(기독교의 한 분파)를 믿는 세르비아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숫자적으로는 보스니아계가 가장 많았지만 세르비아계는 옆나라에 있는 모국(?) 세르비아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세력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었던 보스니아는

유고 연방의 중심축인 세르비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보스니아 내부의 세르비아계는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보이콧했고 모국(?)인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유령국인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보스니아 내전이다.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하며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UN 안전보장 이사회는 내전의 당사자들과 협상하여 안전지대 열 곳을 정해 난민을 수용하고 UNPROFOR라는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개인화기와 약간의 차륜식 장갑차가 전부였던 UNPROFOR 병력은 공군의 지원까지 받는 세르비아계 민병대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UNPROFOR은 UN 안보리 헌장 제7장에 의거한 평화강제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됐지만 내전의 포화 속에서 자국 병력의 생존 자체가 최우선 목적이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됐다.

 

이런 상황 속에 안전지대로 지정된 보스니아 동부의 스레브레니차 지역엔 4만여 명의 보스니악(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스레브레니차의 치안을 담당하던 UNPROFOR 병력은 네덜란드군이었는데 그 숫자는 고작 150여 명뿐이었다.

 

다른 지역에서의 몇 차례 교전을 통해 UNPROFOR의 무기력함을 파악한 세르비아 민병대는 가장 치안이 취약한 스레브레니차를 습격해 30명의 네덜란드군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다급해진 네덜란드군은 F-16 두 대를 세르비아 영공 안까지 침투시켜 폭격을 시도했지만 세르비아는 네덜란드군 포로 30명을 사살하겠다는 협박을 앞세워 F-16의 기수를 돌리게 만들었다.

 

그 후엔 모든 것이 세르비아 민병대의 뜻대로였다. 믈라디치는 압도적인 숫자의 민병대를 이끌고 명색 뿐인 UN 안전지대 스레브레니차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는 네덜란드 역사에 기록될 치욕적인 요구를 건넸다. 반군으로 징집될 우려가 있는 보스니악 남자들을 모두 넘기라는 것이었다.

 

네덜란드군은 세르비아 민병대와의 전면전을 두려워했고 결국 믈라디치의 협박에 굴복했다. 네덜란드군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8천여 명이 넘는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을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넘겨버린 것이다(당시 EU의 의장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적인 지탄을 받아내각이 총사퇴하기에 이른다.).

 

1995년 7월 11일.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 마을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무슬림 소년 이주딘 알리치에게 초콜릿을 건넸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이주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점령지 민간인들을 향한 믈라디치의 이런 자애로운 모습은 TV로 방송되며 그의 진면목을 감추어 주었다.

 

 

이주딘이 맛있게 초콜릿을 먹고 있던 그 시간, 이주딘의 아버지 사제트는 믈라디치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근처 숲 속으로 끌려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다른 보스니악들과 함께 사살당했다.

 


믈라디치에게서 초콜릿을 건네받는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장성한 이주딘

 

그 후로 며칠에 걸쳐서 정확한 숫자조차 집계할 수 없는 광기어린 학살이 자행됐다. 믈라디치의 부하들은 보스니악들을 버스와 트럭에 나눠 태운 뒤 인적이 드문 여러 장소로 분산해 옮겼다. 얼마 후 야다르 강과 체르스카 강 계곡에선 30분 동안 총성이 계속됐다.

 

강 기슭에 유기된 학살의 희생자들

 

크라비차와 산디치의 창고들에선 로켓 추진형 수류탄과 기관총까지 동원해

보스니악들이 학살됐다. 그리고 학교에서, 길가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악들을 총으로 쏘고, 불태우고, 창으로 찌르고,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그중엔 1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내전이 종식된 후 믈라디치는 전범으로 기소됐지만 16년 동안이나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보스니악에겐 철천지 원수였지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믈라디치는 영웅이었기에 그는 동족의 비호를 받으며 유유자적한 도피 생활을 즐겼다. 실제로 16년 동안 믈라디치의 은신을 도와준 것은 바로 세르비아 정부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공공연한 지적이었다.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들을 담은 관들

 

유럽 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세르비아 정부는 믈라디치와 함께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을 주도했던 라도반 카라지치를 2008년 국제유고전범재판소(CTY)에 넘겼다.

 

믈라디치와 함께 서있는 카라지치(오른쪽)

 

하지만 유럽 연합은 믈라디치까지 국제사법 재판소에 넘겨야 세르비아를 EU에 가입시켜주겠다고 조건을 내걸었으며 결국 2011년 5월 27일, 믈라디치는 세르비아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헤이그 사법 재판소에 넘겨졌다.

 

발칸 반도 최악의 전범으로 꼽히는 믈라디치는 여전히 누군가에겐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실제로 믈라디치를 영웅시하는 세르비아 극우 민족주의 세력은 그를 체포한 세르비아 정부에 반발해 현재 유혈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보스니악과 세르비아인들은 같은 슬라브족이다. 3세기경까지 같은 터전에 살던 슬라브족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각각의 문화권을 형성하긴 했으나 완전히 다른 인종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단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은 보스니악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세르비아는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전파한 중동의 부족신 야훼를 각각 알라와 여호와라고 다르게 부르게 된 두 세력 간에 일어난 처절한 학살극. 그것이 보스니아 내전의 숨겨진 얼굴이다.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죽은 오스트리아 황태자는 신분을 뛰어넘어 시녀 출신의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다.

 


 

황제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해도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황실 일가의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시녀 출신의 비천한 여인은 황태자비가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왕실 마차에 탈 수 없었으며 왕실에서도 남편의 옆에 앉을 수 없었다. 신데렐라는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온몸으로 절감해야 했다.

 

보스니아 총독의 초대를 받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평소 같으면 남편과 함께 동행하지 못했을 황태자비는 남편의 배려로 사라예보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공식 환영회에 참가하게 된 황태자비는 처음이자 마지막 행복감에 젖어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첫 번째 암살 시도가 발생해 수류탄이 폭발했을 때도 그녀는 남편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황태자가 자신 대신에 수류탄에 부상당한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할 때 황태자비는 시청에 남으라는 주변인들의 조언을 거절하며 말했다.

 

“대공(황태자)께서 오늘 대중들에게 그분의 모습을 보이시는 한 나는 그분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결국 황태자 부부는 함께 병원으로 향했고, 그 길엔 세르비아 비밀결사의 암살자 가브릴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브릴로는 거침없이 황태자 부부의 차량으로 다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목에 총상을 입은 황태자는 복부에 총상을 입은 아내를 보며 이렇게 애절하게 외쳤다.

 

“여보! 죽어선 안 돼! 우리 애들을 위해 살아있어야 해!”

 

 

하지만 두 사람은 잠시 후 함께 죽음에 이르렀고 그들이 애타게 지키려 했던 세 명의 자녀들은 황실 안에서도 버려졌으며 황태자 부부의 죽음을 계기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15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연합국(러시아와 영국, 프랑스)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사이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이 선이고 반대편이 악이라는 식으로 편가를 수 없다. 양진영 모두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어떻게 전쟁을 시작할까 명분을 찾던 와중에 황태자 부부의 죽음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을 뿐이다(황태자 부부가 제국주의의 정점에 선 권력자였다면 모를까, 프란츠 황태자는 시녀 출신의 아내와 결혼을 함으로 황제에게 버림받은 상태였다.).

 

난 극우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국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추악한 제국주의의 충돌이었고 프란츠 황태자 부부는 그 전쟁의 명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난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에서 종교가 다르거나, 서로에게 걸린 이권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또다시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학살...

 

유행이 반복되는 것은 오래된 옷을 옷장에서 꺼내입게 만들어 줄 수 있지만, 학살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만들 뿐이다.

  

희대의 학살자 믈라디치가 검거되고, 지난 밤엔 그런 역사를 가진 세르비아와 친선 축구를 하고, 또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근대사에서 벌어진 학살극의 장본인을 심판대에 세우지 못 했다.

 

믈라디치는 숨어다니는 시늉이라도 냈다지만, 우린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극의 장본인이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모 정당의 자문위원께서는 광주의 학살자를 두둔하며, 그를 학살자라고 부른 한 개념찬 배우를 향해 미친 년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도 그런 자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 안의 광주 항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초창기 딴지일보를 보며 키득거리던 X세대였던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이제 꼰대 소리를 듣는 중장년이 되었다. 반값 등록금 투쟁을 위해 광화문 거리로 나선 젊은이들의 어깨에 5.18의 빚까지 얹을 수 없는 것은, 5.18을 겪고 자라온 우리 꼰대들의 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인본주의자다.

인간의 생명과 자유, 평등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알지 못 한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살이나 개인의 권력욕으로 자행되는 학살이나, 집단의 이기심으로 자행되는 학살이나,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추억으로 되새기며 영웅시하는 자들이 등장하길 원치 않는다.

 

엽전들한텐 독재가 어울려.

조센징은 그저 두들겨 패야돼.

전라도 새끼들은 그 때 다 싸그리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아직도 그렇게 누군가는 그리워하며 추억하는 학살의 역사.

 

그 학살자 새끼와 그 패거리들이 곱게 죽기 전에, 우리 꼰대들이 아니면 누가 그들을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블루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