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발제

104) 아리기(2009). 조반니,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4부 11장)

ycsj 2010. 12. 21. 18:20

제11장국가, 시장 그리고 자본주의, 동양과 서양

 

*.존 미어샤이머 vs.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브레진스키: “중국은 확실히 국제 체계 안으로 동화되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국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무익할 뿐이고, 중국 영향력의 조심스러운 확산이 세계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점을 인식한 것 같다.”

미어샤이머: “중국은 평화롭게 부상할 수 없다.”(427)

브: “중국의 지도자들은 강대국의 지위를 열망했던 이전의 국가(독일, 일본-발제자)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융통성 있고 노회한 것 같다.”(428) # 韜光養晦

*경제력과 군사력의 관계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 호소한 것은 사실상 그들이 경제적 수단으로 얻을 수 없는 힘을 군사적 수단으로 얻으려고 한 시도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431)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자국의 커져가는 경제력을 공고히 하는 데 영국에 군사적으로 도전할 필요가 없었다.(431)

오늘날 이 지배적인 강대국에 도전하려고 하거나 도전할 수 있는 신흥 군사 강국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적인 강대국은 자신이 확실히 보여줄 수 없는 것, 즉 미국은 군사력의 파괴적 힘에 기초하여 미국의 이익과 가치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목표인 끝이 없는 전쟁에 열중하고 있다.(431)

이런 환경에서라면, 중국이 미국을 상대할 최적의 힘의 전략은 초기의 미국이 영국을 상대한 전략의 한 변형이지 않을까?

1)미국으로 하여금 테러와의 끝없는 전쟁에 군사적`재정적으로 스스로 소진하게 만든다.

2)갈수록 일관성을 잃어가는 미국이란 초강대국에 물자와 신용을 공급하여 스스로 부유해진다.

3)팽창하는 자국 시장과 국부를 이용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그러나 반드시 중국에 군사적으로 지배되는 것은 아닌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출하는 데 동맹국(어느 정도 미국의 협조도 포함하여)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431-2)

*현재 미국과 중국의 관계

1)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과 영국의 관계

2)전간기 일본과 미국의 관계

3)2전 후 미소 관계

4)놀랍게도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비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기존 헤게모니 강국(영국)과 그 시대에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신흥 강국(미국) 사이의 관계와 비교하는 것은 도외시한다. 이 관계는 정확하게 미국이 영국의 헤게모니에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도전하기 시작했을 때, 심한 상호 적대에서 점차 긴밀한 협조로 전개되기 시작했다.(432)

이러한 평가는 특히 미어샤이머의 이론이(제10장에서 논한 로버트 캐플런과 제임스 핑커턴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고유한 국가 간 체계의 역사적 경험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432-3)

*이 장의 주요한 목표는 (키신저의 말처럼)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국가 간 관계 체계 전체가 미어샤이머 이론이 기초한 서구적 동력과는 선명하게 대조되는 장기적 동력을 특징적으로 지녀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상이한 동학은 18세기와 19세기 초까지 국가 만들기와 국민 경제 만들기에서 널리 인정된 중국의 우위를 낳았다.

그러나 이 동력은 또한 이후 세계화하는 유럽 체계의 구조 안에 동아시아 체계가 종속적으로 편입되는 조건 역시 창출했다. 이러한 종속적인 편입은 이전에 존재했던 이 지역의 국제 관계 체계를 변형했지만 파괴하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동력이 동아시아를 편입시킨 서구 체계 자체의 변형에도 기여했다는 점이다(이러한 변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결과는 동아시아의 경제 부흥에 특히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 정치-경제적 이종 교배 구조이며, 그 결과 나타난 세계의 변형이었다. 서구의 경험에 기초한 이론으로는 이러한 변형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433)

 

0.5백년간의 평화

서구 사회과학의 가장 큰 신화 중의 하나는 국민국가와 이에 기초한 국가 간 체계의 조직이 유럽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은-…-유럽 각국 중 어느 국가보다도 훨씬 오래전에 국민국가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국가들은 중심인 중국에 직접 연결되거나 혹은 중국을 통하여 무역 및 외교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자신들의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원칙, 규범 및 규칙을 이해하고 공유함으로써 다른 세계와 구별되는 하나의 세계로 묶였다.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체계를 전공하는 일본 학자들이 밝혔듯이, 이 체계와 유럽의 국가 간 체계는 상호 비교 연구가 논리적으로 충분히 의미있을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각주 8 참조)-433-4

조공무역 체계는 이들 국가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상징적 틀을 제공했지만, 그럼에도 그 틀은 상당히 느슨하여 중심인 중국에 대해 주변을 구성하는 국가들에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했다.(434)

다중심적 정치 체계(스기하라 가오루)-435

*두 체계의 동력상의 차이

1)군사 경쟁-팽창 vs. 3백 년 동안의 평화(1592-1895)

2)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서로 경쟁적으로 해외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에 비교할 만한 정도로 군비 경쟁에 힘쓰는 경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437)

**전쟁 만들기와 영토 만들기 vs. 국가 만들기와 국민 경제 만들기(437)

**변경의 시각: 피터 퍼듀

청조의 주요 목적은 방어하기 어려운 변경(frontier)을 반란을 진압하고 평화를 회복한 주변(periphery)으로, 그리고 내륙 아시아에서 오는 약탈자와 정복자들에 대항할 완충 지대로 변형하려는 것이었다. 일단 이 목적이 1790년대 무렵까지 달성되자, 영토 팽창은 멈추었고 군사 활동은 정치 활동으로 바뀌었다. 이 정치 활동은 새롭게 확립된 국경 안에서 중화 제국의 폭력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확고히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영토 팽창도 꽤 상당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유럽 팽창의 잇따른 물결과 비교하면 빛이 바랜다.(438)

**유럽식 순환: 자체 강화적 순환

**청조의 영토 팽창은 해외 주변 지대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벌인 경쟁에 의해 견인된 것도 아니고, 팽창의 결과가 그러한 경쟁도 아니었다. 그러한 경쟁과 관련 있는 정치경제의 논리는 중국의 관행과 거의 공통된 점이 없었다.

“중화 제국은 주변으로부터 자원을 수탈하기보다는 주변에 투자했던 것 같다. 새로운 변경을 편입하기 위한 정치적 팽창은 정부가 주변에서 자원을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자원을 이동하도록 했다.”(R. Bin Wong, 각주 16)-439

유럽과 동아시아 체계의 이러한 상이한 동학은 두 개의 다른 차이점, 즉 체계 구성 단위 사이에 힘의 분배에서 나타나는 차이점과, 힘의 일차적 근원이 얼마만큼 체계 내부에 있고 얼마만큼 체계 외부에 있는지에서 나타나는 차이점, 이 두 차이점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이 두 차이점에 의해 기본적으로 결정되었다.(439)

칼 폴라니의 세력 균형 메커니즘(440)

동서무역의 비대칭(441): 그 비중이 유럽에서 컸다.

찰스 대버넌트: 아시아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바로 “모든 상업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지위에 있다고 주장(442)

제8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럽 내 힘의 투쟁의 외향성이 자본주의`군사주의`영토주의의 특정 결합을 가져온 주요 결정 요소였고, 이 결합이 유럽 체계를 세계화한 추진력이었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 체계의 동력은 이와 정반대로, 힘의 투쟁의 내향성이 “끝없는” 영토 팽창을 향한 경향이 전혀 없는, 정치적 힘과 경제적 힘의 결합을 낳았다. 동아시아 체계 동력의 이러한 성격은 유럽에 대한 내 주장을 지지해주는 사실적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외향적인 유럽 경로의 출현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개척한 힘의 전략의 확산이라는 견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내향적인 동아시아 경로의 출현은 명과 청이 그들 시대에서 단연 제일 큰 시장 경제를 발전시키는 정책에서 거둔 성공이라는 견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442-3)

 

0.시장 경제와 풍요로 가는 중국의 ‘자연스러운’ 경로

국가 시장은 국민국가나 국가 간 체계와 마찬가지로 더는 서구의 발명품이 아니다. 우리가 제1부에서 보았듯이, 애덤 스미스는 서구 사회과학이 후에 잊어버린 것, 즉 18세기 내내 단연 최대의 국가 시장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국가 시장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지만, 그 18세기의 배치는 명과 청 초기의 국가 만들기 활동에서 생겨났다.(443)

해상 무역과 벼농사 발전에 함께 영향을 받아, 연안 지역은 장기적인 경제적 상승을 경험하였는데, 이는 항해 기술의 진보, “해상 실크로드”의 확립, 조공무역 중심지로서 동남 해안의 광저우, 취안저우(泉州) 및 항구 소도시의 번영에 기초하였다. 동시에, 동남아시아 도서 지역에 형성된 중국인 정착 거주지는 민간 해상무역을 활성화하여, 민간 해상교역이 중국과 해상 아시아 간 경제 교환의 주요 형태로서 공식적 조공무역을 능가하게 되었다.(각주 23) 민간 해상무역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원(元, 1277-1368) 통치하에 동남아시아로 이주가 지속되면서, 남지나해와 인도양에 걸친 화교 교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데, 동시대 어떤 유럽의 네트워크보다 광범위했다. 송원(宋元) 시대에 훗날 유럽 발전 경로에서 전형적으로 된 경향들이 이미 동아시아에는 존재했던 것이다.(각주 24)-444

명대에는 이런 경향들은 통제하에 들어갔고 국내 교역을 우선시하고 때로는 외국무역을 금지하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천도, 운하 체계, 면화 재배―>국가 시장 확대(445)

1405년에서 1433년 사이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횡단한 정화 장군의 대항해 역시 외국 무역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445)

재닛 아부루고드: 명이 인도양에서 물러난 것은 “적어도 과거 백 년 동안 진지한 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절망하게 만들었다.”(446)

동아시아의 맥락과 유럽의 맥락에서 부와 힘의 추구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447)

유럽 국가들은 서와 동을 연결하는 해로에 대해 배타적인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왜냐하면 동양과의 무역에 대한 통제력이야말로 부와 힘의 추구에서 결정적인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국의 지배자들에게는 이러한 무역로에 대한 통제력이 이웃 국가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나 인구가 많은 자국 통치 영역을 농경에 기초한 국가 경제로 통합하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했다. 그러므로 명이 동서의 해로를 지배하려는 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대신 국가 시장의 발전에 집중한 것은 매우 합리적이었으며, 명은 훗날 스미스가 풍요로 가는 “자연스러운” 경로의 본보기라고 말한 발전을 열어젖히게 된다.(447)

중국의 조공무역은 사실 경제적 이익보다 경제적 비용이 더 컸다. … 명목상 조공이라는 것은 사실상 중국(中國, the Middle Kingdom)으로 하여금 제후국의 충성을 “사고” 동시에 제국의 넓게 퍼진 변경 전역에 사람과 상품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쌍방향 거래였다.(각주 28)-(447)

명의 재정적 곤란은 1590년대 일본과의 값비싼 전쟁과 1610년대 만주족과의 전면전 발발, 조정과 행정 체계에 만연한 부패로 인해 가파르게 고조되었다. … 은의 가치가 급등하자, 농민의 세금 부담이 가중되었고, 제국 전역에 소요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소요가 극한에 이르러 결국 1644년 명은 붕괴하였다.(450)

1661년과 1683년 사이에 청은 민간 해상 교통을 다시 금지하였고, 중국과 세계 시장을 연결하던 핵심 연결고리였던 중국 동남 해안을 양자를 분리하는 무인 지대로 바꾸는 초토화 정책을 추진하였다.(遷界令)-(450)

이러한 정책들(공간적`시간적 불균형의 대처, 내지 주변부 향상, 상평창)이 결합된 결과는 주목할 만한 평화, 번영 그리고 인구증가였고, 이것이 18세기 중국을 스미스의 풍요로 가는 “자연스러운” 경로의 본보기로 만들었으며, 유럽의 자비로운 절대주의, 엘리트주의, 농업에 기초한 자연 경제의 지지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게 하였다. … 윌리엄 로는 … 진굉모(陳宏謀)가 스미스, 홉스, 로크나 몽테스키외 못지않게 시장을 지배 도구로 높이 평가했다고 말한다.(453)

청 정부가 농업 개량, 토지 재분배와 개간, 국내 시장의 확립과 확대를 최우선한 것은 정확하게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창한 것이다.(454)

 

자본주의적 시장 기반 발전과 비자본주의적 시장 기반 발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0.비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안의 자본가들

마크 엘빈: 중국이 고도 균형의 함정에 빠진 것은 바로 거대한 국가 시장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생산과 인구의 급속한 증가가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자원을 희소하게 만들어버렸고, 이것이 이번에는 이윤 높은 혁신을 갈수록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455)

시장 기반 발전의 자본주의적 성격은 자본주의적 제도와 성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자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시장 경제에 원하는 만큼 많은 자본가를 더 투입한다고 해도, 국가가 그들의 계급 이익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시장 경제는 여전히 비자본주의적이다. 페르낭 브로델 역시 중화 제국을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는 구분해야 한다는 [그의-인용자] 주장을 가장 적절히 뒷받침하는” 사례로 들고 있다.(457-8)

중국 내에서 상업 중개인들과 하위 도급업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제하는 대규모 비즈니스 조직은 국가 경제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원거리 교역에서조차도 진입은 유럽보다 훨씬 개방되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도 접근할 수 있었다.(각주 48) 그 결과 자본가들은 일반적 이익을 자기 자신의 계급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하위 사회 집단으로 남았다.(459-60)

사실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최고의 기회는 중심에 가깝게 있지 않고(# 광둥 13행의 경우), 오히려 틈새에 즉 체계 내 각국의 외곽 가장자리에 있었다. 이러한 발전의 가장 현저한 체현자가 화교 공동체이다. 이들의 탄력성과 지속적인 경제적 중요성은 세계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어렵다. 명의 해금, 무슬림과 주기적인 불운, 다른 경쟁자들로부터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화교 공동체는 대단한 이윤을 남겼으며, 현지 정부에게는 꾸준한 세수를 중국 연안 지대에는 송금을 제공했다.(Hui, 각주 49)-460

17세기 명`청 교체기: 네덜란드에 필적할 만한 상업 제국인 정씨 가문의 등장(460-1)

중국의-…-자국 중심적인 발전의 성공이 청으로 하여금 공격적인 해양 “오랑캐들”이 이 지역에 가져오고 있던 새로운 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정말 당연하다.(463)

간단히 말하면 유럽의 발전 경로에 전형적인 군사주의, 산업주의, 자본주의의 시너지는 끊임없는 해외 영토 팽창을 촉진했고 거꾸로 이로써 지탱되었는데, 이런 시너지가 동아시아에는 없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오랜 기간 평화를 누렸으며, 중국은 세계 최대의 시장 경제라는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식의 해외 팽창과 군비 경쟁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과 동아시아 체계 전체가 팽창하는 유럽 열강의 군사적 맹공에 취약하게 되었다. 맹공이 왔을 때, 동아시아가 세계화하는 유럽 체계 속에 종속적으로 편입된 것은 다 아는 결과이다.(464)

 

0.편입과 이종 교배

영국의 포함이 중국 국내 시장을 둘러싸고 있던 정부 규제의 벽을 무너뜨린 후에도, 영국 상인과 생산자는 중국인 경쟁자를 압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464)

면포의 사례. # 마오둔의 [봄누에]에서 비단공업의 문제.

그러나 철도와 광산을 제외하면, 중국 시장은 대체로 외국 상인들에게는 좌절을 의미했다.(465)

중국이 영국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 구조 안으로 편입된 것은 (중국의) 토착적 자본주의 형태를 파괴하기는커녕,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체계의 틈새에서 발전해온 화상(華商) 공동체가 다시 한 번 팽창할 수 있게 하였다.(465)

아편 무역, ‘쿨리 무역

쿨리 무역은 개별 상인들에게 큰 부를 일구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싱가포르`홍콩`페낭`마카오 등 항구도시들이 부를 축적하게 해주었고, 이 항구도시들은 화상 공동체의 부를 담는 특권적인 ‘용기’가 되었다. 또한 쿨리 무역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중국인 정착 거주지가 증가하여, 화교 자본은 그 지역의 사법 권역[국가들] 내부와 사법 권역[국가들] 간의 상업적`금융적 매개를 통해 더욱 이윤을 수취할 수 있게 되었다.(Hui, 각주 58)-465-6)

청조는 화교 활동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구하게끔 되었다. * 정치적 교환(466)

군사력은 실로 동아시아를 서구에 종속시키는 관건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역의 사용이 영국 상인들이 중국 시장에 합법적으로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는 점이다.(466) #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을 도치하지 말아야 한다.

조지프 에셔릭: 19세기 전반기를 통틀어 아편이 “서구가 중국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입장권”이었다.(각주 60)-466

아편무역

(아편전쟁 패배 이후) 약 1세기 동안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종속적이고 갈수록 주변화하는 성원이 되었다. 이러한 주변성의 심화는 동아시아가 유럽 체계 내에 종속적으로 편입된 결과만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유럽의 발전 경로의 걸음을 따라가려는 중국과 일본의 시도로 동아시아 내에 촉발된 국가 간 관계의 급격한 변화였다.(470)

19세기 말과 20세 초 일본의 근대화와 영토 팽창은 동아시아 조공무역 체계에서 중심이 되고자 했던 몇 세기 동안의 노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한 것이었다.(470)

청일전쟁의 결과는 이번에는 일본과 중국의 공업화 궤도의 기초에 있는 차이를 심화했다. … (472)

일본은 마침내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을 대신해] 중심이 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일본의 패배로 귀결(473)

 

0.미국 헤게모니와 일본의 부상

서구의 발전 경로와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이종 교배는 두 가지 방향의 과정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수렴은 주로 동아시아에서 서구 경로 쪽

20세기 후반에는 방향을 바꾸어 서구 경로가 동아시아 쪽으로 수렴되었다. 누구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이 수렴은 미국의 냉전 체제의 확립으로 시작되었다.(474)

쌍무적 방위조약(일본, 한국, 타이완, 필리핀과)에 기초한 미국의 수직적 체제가 탄생

*미국 체제는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체계와 세 가지 면에서 중요한 유사성

1)중심 국가의 국내 시장이 가신(家臣) 국가의 시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2)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중심 국가의 국내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획득하기 위해, 가신 국가들은 중심 국가에 대해 정치적 종속 관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3)정치적 종속과 맞바꿔서 가신 국가들은 ‘선물’과 중심 국가와의 매우 유리한 무역 관계를 인정받았다.(475)

이것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관대한’ 전후 초기 무역과 원조 체제였으며, 오자와 데루토모와 스기하라는 모두 바로 이것을 동아시아 부흥의 기원으로 추적한다.(각주 76)-475

*양 체제 사이의 두 가지 중요한 차이

1)미국 중심 체계는 선행한 중국 중심 체계보다 훨씬 더 구조와 지향에서 군사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체계는 제국과 가신 국가 사이에 기능적 특화를 육성했는데, 이는 중국 체계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미국은 정치적 힘의 추구로 특화한 반면, 미국의 동아시아 가신 국가들은 무역과 이윤의 추구로 특화하였다. 이 정치적 교환 관계는, 동아시아 지역의 부흥을 주도한 일본의 화려한 경제 팽창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75-6)

2)이 지역에서 미국 중심 냉전 체제는 매우 불안정했다. 한국전쟁, 미 군사 시설 군도(群島), 베트남 전쟁의 패배는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이 여타 동아시아와 정상적인 통상과 외교를 할 수 있도록 다시 받아들이게 했다.(476)

이 지역에서 미국 군사 체제의 위기와 동시에 일어난 일본 국가 시장과 일본 비즈니스 네트워크의 팽창은, 이식된 (서구) 형태보다는 토착의 (동아시아) 형태와 더욱 유사한 국가 간 관계 형태가 재현했음을 표지한다.(476-7)

토착의 (동아시아) 형태에서는 중심적 지위가 일차적으로 체계 내 국민 경제의 상대적인 크기와 고도화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반면 이식된 (서구) 형태에서는 중심적 지위가 일차적으로 체계 내 군산 복합체의 상대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477)

일본의 경제 발전: 저렴한 일본의 신용과 상품, 수직 통합형 다국적 기업, 다단계 하청 체계, 동아시아 국가로의 일출 효과, 화상 네트워크에 의존(477)

일본식 다단계 하청 체계가 동아시아 전역에 확대된 것은 그러므로 위로부터 미국의 정치적 후원뿐 아니라 아래로부터 화교들의 상업적`재정적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다.(Hui, 각주 81)-478

미국의 돌변: 관대함―>보호 공갈

보호비 요구, 엔화 가치의 대폭 절상과 수출 자율 규제 등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수직 통합형 기업을 대신하여 월마트와 같은 하청형 기업이 미국 비즈니스의 주도적 조직으로 등장하게 했다.(479)

미국 하청 네트워크의 형성과 확대를 서구가 동아시아 패턴으로 수렴하는 또 다른 실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479)

세계의 주도적 자본주의 조직 간의 경쟁 투쟁의 강화에 동아시아 하청 네트워크가 동원되면서 가장 혜택을 받은 것은 중국 자본도 미국 자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또 하나의 유산인, 화교 자본 공동체였다.(479)

*화교 공동체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체계의 틈새에서 싹튼 자본주의 맹아의 중요한 소재지

성장의 최대 기회는 세계화하는 영국 중심의 체계 구조 안에 동아시아가 종속적으로 편입되면서 찾아왔다.

동남아시아, 특히 홍콩과 타이완과 미국으로의 중국인 이주(480)

이들의 부와 힘에 최대의 기회는 1980년대 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에 중국 본토가 재통합되면서 찾아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결정적인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외무역과 투자에 문호를 연 것이다. 그 성공으로 동아시아 부흥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가 시작(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