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발제

근대 이후의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 어드벤처/ 이진경

ycsj 2010. 4. 17. 00:20

 

 

이진경(2007)편저,『문화정치학의 영토들-현대문화론 강의』, 그린비, 서울, 592.

서문 및 1강

 

서문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근대를 넘어선다는 것이, 상품과 미디어의 복제능력에 의해 혁명적 꿈과는 먼 어떤 니힐리즘과 동일시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맑스’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하나의 사유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 역시 근대를 넘어서는 것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은 거대한 상품과 미디어의 공세 앞에서 넋을 잃은 니힐리즘과 달리, 새로운 삶의 가능지대를 표시하는 희망의 표지일 수도 있지 않을까?(5)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던이라는 말로 표상되는 ‘문화적 사회구성체’의 여러 측면들을 바로 이런 관점에서 검토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 리오타르나 보드리야르 같은 유명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영토를 … 오히려 맑스적인 전복의 가능성, 혹은 새로운 긍정적인 삶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방식으로 관통하고자 한다.(6)

흔히 ‘시뮬라크르’나 ‘복제’, ‘스펙터클’ 등의 말로 불리는 지극히 현대적인 문화적 현상들이나 ‘전자감시’ 같은 현상들을 세심히 보면서 탈주의 선을 창안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 벤야민의 희망

우리는 현대 문화 … 의 지반을 형성하는 좀더 넓은 문화적 구성체들에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근대라는 시대와 강력한 친화성을 갖는 시간이나 공간의 형식, 그리고 기억과 역사의 문제, 시선이나 얼굴의 문제 등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6)

근대를 특징짓는 몇몇 이념들, 탈근대의 선언과 더불어 역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감각과 사유를 사로잡은 채 작동하고 있는 몇 가지 이념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새로운 삶의 전망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자 했다. # 계몽주의, 휴머니즘, 오리엔탈리즘, 식민주의 등(7)

‘코뮨주의’의 이념적 나침반의 역할(7)

: 그때그때 올바른 삶의 방향을 포착하면서 그 방향들 전체에 하나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태도의 집합으로서 이념(7)

 

제1부포스트모던의 조건

 

1강 근대 이후의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 어드벤처/ 이진경

 

1.문화적 복제, 복제의 문화

 

‘복제’라는 현상은 종종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그 모든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로 묶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리하여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가장 대표적인 양상으로 간주된다.(15)

복제의 시대

보드리야르: 시뮬레이션

이라크전쟁은 그런 전쟁이 사실은 항상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유별한 전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디즈니랜드가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처럼 유치한 세계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거기 [따로] 있듯이. 그리고 감옥이,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따로] 있듯이”(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40). 그리고 그것을 통해 미국의 지배에 저항하거나 거슬리는 자는 누구나 저렇게 되리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6)

‘시뮬레이션’이란 모든 영역에서 일반화된 복제 문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17)

사진과 영화: 복제 기술

말 그대로 ‘원본’이나 ‘진실’이 소멸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니 복제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새로운 변형과 창조의 원천이 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17)

신이라는 거대한 ‘허구’에서 벗어나, 과학이 제공하는 말 그대로 ‘투명한 진정성’을 추구하던 근대에는 더욱더 강력한 문화적 힘을 갖는 것이었다.(17)

기술적 복제가 문화적 복제를 통해 문화 자체를 복제화하는 ‘복제 문화’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문화를 흔히들 ‘탈근대적 문화’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 적어도 근대적인 문화가 근본적인 단절과 변형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상황이 된 듯하다.(17-8)

그렇다면 그것은 ‘근대’라고 불리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표시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성의 틀을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향해 치달리는 수많은 궤적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시대.

진정성의 소멸 속에서 매우 섬뜩한 어떤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던 어드벤처.(18)

 

2.‘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0.르 코르뷔지에나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대표로 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흔히 ‘기능주의’라고도 불리며, 국제적인 건축운동으로 진행되었기에 ‘국제주의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신고전주의의 지극히 장식적인 건축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18-9)

금욕적이고 유토피아적이며 합리주의적인 건축을 추구.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미스 반 데어 로에(19)

0.포스트모더니즘 건축

그것(모더니즘 건축)은 삶의 복합성을 지극히 단순한 하나의 형태로 환원시켰고, 과거의 양식과 지나치게 절연함으로써 과거와의 모든 연속성을 읽어버렸다.

“더 적은 것은 더 지루한 것이다”(Less is bore)-벤추리(19)

그들은 이제 과거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건물의 현재 속으로 끌어들였고, 르네상스 시대 이후 즐겨 사용된 고전적 형태는 물론 리본과 같은 장식도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극히 다양한 내부 공간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상이한 시대의 건축 양식(코드)들이 뒤섞여 공존하게 된다. 이를 젱크스는 ‘이중 코드화’라고 부르며, 이것이 현대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를 특징짓는다고 말한다(젱크스, [현대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 6) 이로써 그들은 현대적 삶의 ‘복합성’과 ‘모순’을 건축물에 반영하고자 했다.(19-21)

0.포스트모더니즘 문학

레빈: 모더니즘의 난해한 지성주의 vs. 반지성주의

핫산, 피들러: 지식보다는 비전, 논리보다는 환각, 에고에 대해서는 이드를 중시

그들은 조이스와 프루스트, 엘리어트, 파운드, 카프카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이 그 가능성을 탕진하여 고갈되어 버렸다고 보며, 그것이 애초에 갖고 있던 저항정신이 대학의 제도 안으로 흡수되면서 소진되었다고 본다.(21)

보르헤스, 마르케스, 에코, 로브그리예, 베케트, 버로우즈, 앤디 워홀 등(21)

0.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

1960년대 프랑스에서 본격화된 철학적 흐름과 관련.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등

근대 철학이 서 있는 지반을 공격, ‘주체’라는 범주, ‘진리’라는 범주 등을 비판 내지 해체, ‘총체성’ 개념을 비판(23)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 데리다 등,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흔히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포스트구조주의는, 근본적으로 근대 철학 내지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설정을 공유하고 있다.(23)

그런데 예를 들면 프루스트나 조이스, 카프가 그렇듯이, 문학적 모더니스트들 역시 사실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근대적인 표상의 방식과 서술의 방식을 해체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은 기묘하게도 문학적 모더니즘과 겹쳐 있다. 이는 몇몇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이 (베케트나 보르헤스는 물론) 프루스트나 카프카 등에 기대어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예를 들면 들뢰즈와 가타리, 데리다 등).(23-4)

0.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모더니즘 스타일이나 특징에 대한 비판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문학이나 예술에 한정된 타당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 근대성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관점”(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342)으로 확장하여 정의할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은 나름의 새로운 적실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25)

 

3.포스트모던 문화

 

0.탈근대의 다양한 양상

생산의 자동화와 정보화, 생산이나 활동의 전 지구화,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주권권력의 탄생,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저항주체의 탄생 등(25-6)

소비가 새로이 부상하게 되는 양상, 복제의 문화에 제한해서 고찰(26)

 

1) 문화로서의 소비

0.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베블런: 유한 계급의 ‘과시적 소비’

보드리야르: 사용가치가 아니라 의미를 낳는 기호적 가치를 가진다. 상품을 기호로 다루는 기호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역설(27)

이제 상품들은 서로 간에 종횡으로 짜여진 의미들의 그물을 짠다. 마치 기호들이 의미들의 그물을 짜듯이. 이는 사람들 자신이 짜는 것이 아니라 상품들 자체 간에 짜여지는 것이다.(27)

그것(벤츠, 바흐 등)은 이미 사람의 의지 외부에 있는, 자기 발로 서 있는 그물이며, 소비자는 단지 그에 적절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사회적으로 훈련되고 때로는 강제되기도 한다.

“소비 사회, 그것은 또한 소비를 학습하는 사회, 소비에 대해 사회적 훈련을 하는 사회기도 하다”(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106).-27

이러한 소비를 통해 사람들은 기호화된 상품들의 그물망에 내장된 사고와 행동 방식을 수용한다.

“소비인은 자신의 향유를 의무로 삼는 존재로, 향유와 만족을 꾀하는 존재로 간주된다”(같은 책, 104)-27-8

더 나아가 이런 소비 대상의 중심에 이제 육체가 들어선다. 건강함과 아름다움은 개인의 절대적인 지상명령이 된다.

건강한, 아름다운 육체, 날씬한 몸매

성과 섹스는 소비되는 상품의 중심에 선다. 이젠 성 자체가 소비의 대상이 된다.(28)

이처럼 코드화되고 의무화된 소비는, 소비하는 사람을 개별화한다.

“노동력의 박탈에 의한 착취는 사회적 노동이라고 하는 집단적 영역에 관계되기 때문에 어는 정도 단계부터는 사람들을 연대(連帶)하게 한다. … 소비자인 한에서 사람들은 다시 고립되고 뿔뿔이 떨어져서 기껏해야 서로 무관심한 군중이 될 뿐이다”(113)-28

즉 소비는 개인적으로 행해지기에, 개인적인 만족이나 불만으로 끝나버린다. TV 프로그램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사태를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28)

소비의 사회와 상품의 기호화는 대략 전후의 서구 사회를 통해 관찰된 현대 사회의 초상화다. 그것은 생산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소비가 지배하는 사회로,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기호적 가치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근대(modern) 사회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28)

뉴딜은 단지 국가 재정을 다루는(deal) 새로운(new) 방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욕망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29)

이제는 절약이나 금욕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 내지 의무가 된다.(29)

소비 사회라는 현상은 이렇듯 변화된 욕망의 배치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30)

 

2) 시뮬레이션

0.마셜 맥루언: ‘매체가 메시지다’

크로넨버그, [Videodrome]: ‘화면이 망막이다’

보드리야르: 매체는 자신의 형식에 따라 작용하는 작동체. 상품 생산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교환가치의 작용 그 자체가 사람들의 관계를 돈과 계산이 지배하는 냉혹한 관계로 만들어버리듯이, 매체의 작용 그 자체는 결코 중립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191). 따라서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30-31)

대중매체는 응답을 거부하며, 응답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방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행한다. 메시지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 오직 가능한 것은 매체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받아들이는 것이다.(31)

그리고 그 메시지는 매체가 내장하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언제나 모델화된다. … 그 모델에 따라 사람들은 상품을 사고, 소비되는 상품의 의미를 읽는다.

또한 어떤 사건(청소년 범죄, 노동조합의 파업, 재벌 기업의 부도)이든 모두 매체의 코드에 따라 상투적인 모델로 변형된다. … 여기서 각 사건이 갖는 그때그때의 특이성은 사라지고, 반복되는 동일한 모델만 남는다. 이러한 절차를 따라 실재계(實在界)는 정해진 코드가 된다(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183)-31-2

매체는 모든 일들을 하나의 이벤트로, 스펙터클(spectacle,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구경거리로 새끼를 친다. … 하나의 스펙터클이 또 다른 스펙터클을 낳고,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를 복제한다([스펙타클의 사회])-32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의 시뮬레이션은 이처럼 다른 스펙터클로부터 복제하는 복제를 통해, 원본보다도 훌륭한 저 원본 없는 복제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모델을 가지고, 그 모델에 따라 스펙터클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본보다 더 생생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스펙터클을 ‘과잉실재’(hyper-reality)라고 부른다.([시뮬라시옹], 12-13, 26-27) 그것은 실재 ‘저편으로 벗어나 있’(hyper)지만, 그래서 실재가 아니지만,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란 점에서 ‘과잉된’(hyper) 실재고, 없는 것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지나친’(hyper) 실재다.(33)

전통적인 기호나 복제물은 무언가를 지시하고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 만들어내는 과잉실재는 원본이 없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시뮬레이션된 모델에 실재를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기호와 근본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레이션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과잉실재가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특징을 이룬다고 보는 셈이다.(33)

 

4.포스트모더니즘과 예술

 

0.스타일이나 방법

혼성모방(패스티쉬), 키취, 과거의 것을 되살려 사용, 평이하게 만드는 것 등

한편으로는 숭고함이나 깊이, ‘진정성’의 소멸과 결부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창조성과 독창성의 원천이 되는 ‘저자’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33)

근대 예술 내지 모더니즘에서 재현, 그것과 갈라지는 지점

 

1) 근대성과 재현

0.서양 근대 미술은 정확성에 대한 강박증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그림은 물론 에술 전반을 재현을 향해 몰고 갔다.

투시법(perspective): 하나의 소실점으로 소실선들이 모이고, 그 소실선들을 척도로 사물들의 크기를 배분하는 기술.(34)

건축 역시 투시법의 영향 아래 포섭되었다.(35)

직각에의 강박

문학 역시 그 재현 강박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리얼리즘

*그러나 예술이 ‘미’가 아니라, 혹은 ‘미’에 머물지 않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36)

인상주의의 계기: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강박이 빛을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형태적 정확성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피카소나 마티스는 이를 ‘오해’하면서 재현적 그림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36)

사실 ‘재현’이란 매우 근본적인 역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 재현은 정확하게 이루어질수록 진리 하닌 거짓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재현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36)

숭고함(sublimity)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고, 재현/표상될 수 없는 것을 재현/표상하게 하는 것인 셈이다.(37)

재현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의지

 

2) 숭고와 재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를 ‘숭고’라는 문제와 관련시킨다.(37)

숭고: 칸트의 [판단력 비판]. 어떤 개념에 적합한 대상을 표상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미적 현상이다. 이는 매우 강력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감정이고, 즐거운 동시에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이다.([포스트모던의 조건], 174)-37

조국을 침략한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싸우다 잡혀서 처형당하는 전사의 죽음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비통해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눈물

꿈과 희망에 가득차 인생을 향해 질주하려는 젊은 렘브란트의 기상

압도할 듯이 감싸며 둘러친 저 거대한 봉우리들 등(37)

리오타르는 숭고라는 개념으로써 근대(모던) 예술을 정의한다. 즉 “표상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을 가리켜 ‘모던’이라고” 부르겠다는 것이다([포스트모던의 조건], 175)-38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내면의 빛이나 말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떠올리려는 시도에서 벗어난다.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pop art)는 그런 숭고함 대신에 일상사 속에서 발견되는 평범함의 주변을 돈다.

앤디 워홀: “현실은 매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실을 환경으로부터 떼어내어 캔버스 위에 놓기만 하면 된다.”

올덴부르크: “마치 미술관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나는 온갖 종류의 상점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쇼윈도와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이 귀중한 미술품처럼 보였다.”(38)

그들은 20세기 전반기의 모더니즘 예술처럼 상품화된 세계에 대한 전복을 꿈꾸지 않으며, 통속적 세계로부터 저주받는 것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미 모더니즘이 제도 속에 자리 잡은 이래 하나의 위선처럼 보였다. 반대로 그들은 저주받은 서명 대신에 서명 자체를 상품화하려고 하며, 그 상품화된 세계 속에 전적으로 편입되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주의를 벗어나며, 반대로 싸구려 복제물들(키취)을 동원하며 그것을 또 다시 복제한다. 즉 아름다움과 독창성의 미학에 대항하여 ‘시뮬레이션 미학’을 만든다([소비의 사회] 157)-39

“팝이 의미하는 것은 투시법과 이미지에 의한 상기(想起)작용의 종언, 증언으로서 예술의 종언, 창조적 행위의 종언, 그리고 역시 중요한 것으로서 예술에 의한 세계의 전복 및 저주의 종언이다”([소비의 사회], 165-6)-39

숭고함->일상성과 평범성

그러나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그들이 주장하는 ‘평범함’이 숭고함이라는 범주의 현대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고 질문한다([소비의 사회], 169). 반대로 그것은 어쩌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마저 예술의 신성한 과정 속으로, 또 다른 숭고함 속으로 밀어넣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39)

이런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에서 미묘한 긴장을 읽어낸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표상할 수 없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는 한에서 그것은 분명 모더니즘의 일부(39)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모더니즘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이다. … 모더니즘은 감춰져 있는 신성한 어떤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걸 보여줄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41)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상 불가능성을 강력히 전달하기 위해서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색하는 것”([포스트모던의 조건], 179-80).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후’(포스트)와 ‘이전’(모던)의 역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포스트모던의 조건]).-41

 

3) 저자의 죽음

저자라는 관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다.(41)

현재의 지평에서 작가가 작품에 담은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발신자-매개체-수신자: 전통적인 소통 이론의 모델(42)

이에 대한 비판: 구조주의, 해체주의, 계보학적 비판(42)

0.구조주의는 작품을 기호들의 구조화된 망으로 본다. … 그렇다면 작가라는 어떤 특권적인 주체가, 작품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리로 귀결되는 어떤 특권적인 중심일 수 없다. 작품의 내적 구조를 찾아내는데 주력해야 한다. … ‘저자의 죽음’(롤랑 바르트) 그것은 철학에서 일어난 주체의 해체와 동형적인 것이었다.(42)

0.데리다의 비판은 더욱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다.

작품 내지 텍스트가 하나의 확고한 통일성을 갖지 못하며, 차라리 이질적인 것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42)

또한 어떤 텍스트도 여백을 포함하는데, 이 여백은 새로운 독서와 해석이 다양하게 생성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 나아가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인용하거나 은밀히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다.

독창적인 원본은 없으며, 텍스트들이 서로 결합된 텍스트들만이 있다는 것이다(이를 흔히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부른다).(43)

발신자는 없으며, 오직 텍스트와 수신자만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죽고 작품을 읽는 사람만이 남는다.

0.푸코는 일단 작품 내지 저작의 개념을 문제삼는다. 저자가 쓴 것은 모두 작품인가? 혹은 출판된 것만이 작품인가?([저자란 무엇인가]. 244-5)

‘저자의 탄생’을 문제삼는다. 즉 저자는 언제 어디서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위치를 갖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반대 현상

“저자 기능은 우리가 저자라고 부르는 어떤 이성적 실체를 확립하고자 하는 복잡한 조작의 결과”다([저자란 무엇인가], 252)-44-5

결국 푸코는 어떻게 해서 저자가 존재하고, 어떻게 해서 작품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가지며, 작품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중심으로 기능하게 되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로써 저자에 부여된 중심적 권위와 배타적 권리는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할 역사적 산물이 된다. 이로써 푸코는 이제 저자를 죽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45)

0.저자의 죽음이란 주체와 총체적 통일성, 진리의 문제 등이 동시에 응축되어 있는 문제다.(45)

보르헤스: 저자 기능을 신랄하게 조롱

 

5.포스트모더니즘과 정치

 

0.어떠한 철학적 전환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시도한다. …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예술에서 철학 및 이론 전반으로 확장되었던 배경에는 히틀러나 스탈린에 의한, 그리고 그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전체주의적 경험이 깔려 있다. 그런 만큼 정치나 운동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주제다.(45-6)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극히 상이한 태도와 각이한 입장들

1) 저지와 내파: 보드리야르(Baudrillard, Jean)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극한적 지점을 보여준다.

상징적 교환: 포틀래치(potlach), 쿨라(kula): 사람들의 관계가 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았다는 것으로 충분한 그런 관계([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주의는 생산의 거울을 통해 이러한 관계를 모두 생산의 체계 안에서 경제적 기능으로 계산되는 것으로 바꿨다.(46)

생산에 반하는 유혹(seduction)의 전략: 그 의미의 명확성을 가리고, 그 의미를 생산하는 지배적인 코드(기호적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47)

그러나 복제가 복제를 시뮬레이션하는 과잉현실의 세계에 이르면 이런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제는 TV가 진실을 만들며, TV가 바로 진실이다.([시뮬라시옹], 68) 매체에 의해 프로그램되고, 매체에 의해 시뮬레이션되는 진실, 그것은 분명히 조작적인 진실이다.(47)

급기야 TV 카메라가 옆에 있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된다. 이젠 자신 스스로가 과잉실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이제 모든 것이 코드화된 과잉실재의 일부가 된다. 이를 보드리야르는 ‘저지’의 단계라고 부른다([시뮬라시옹], 71) 그것은 과잉실재가 실재를 대체해버린 상황에서, 혹시라도 이 안에서 프로그램되지 않은 우발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전략이다.(47)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모두 코드화하는 권력의 요구대로 그 과잉실재 속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 이(TV에 몰두)로써 생산의 질서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함몰하리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밖으로부터의 공격에 의해 폭파(explosion)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몰려 들어감으로써 내파(implosion)되는 것이다.([시뮬라시옹], 130)

이는 사람들의 삶을 생산과 상품, 소비로 한없이 흡수하는 자본주의와 권력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반어적인 냉소요 섬뜩한 저주다. 허무주의적 전략.(48)

 

2) 등가와 접합: 라클라우와 무페(Laclau, Ernesto & Chantal Mouffe)

전통적 노동운동이나 좌익정당은 이 운동(여성운동, 동성애자운둉, 반인종주의운동, 환경운동, 문화운동 등)을 이끌거나 포섭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됐다.(49)

‘새로운 사회운동’. 그것은 모든 운동이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총체성의 관점과 맞서는 것을 뜻했다.(49)

라클라우와 무페는 이러한 입장을 라캉과 데리다의 이론을 이용해 이론화하였고, 사람들은 이들을 포스트맑스주의(post-Marxism)라고 불렀다. 그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회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담론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였으며, 이미 주어진 것으로 고정된 것은 없다고 했으며, 총체성이란 범주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라클라우 & 무페, [사회변혁과 헤게모니]).(49)

그들은 모든 사회적 실천이 담론(구성체) 안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 담론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실천은,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담론적 실천이다. 잠정적인 고정점 역할을 하는 적대를 통해 이러한 담론적 실천들 사이에 적대적인 분할이 발생하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등가적인 접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49)

요컨대 라클라우와 무페는 등가와 접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운동에 서로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려 했고, 그것을 통해 각 운동이 갖고 있는 고유성과 차이를 부각시키려 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종속시키는 어떤 특권적인 어떤 중심으로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한 등가화된 운동들의, 시기마다 고유한 연대와 접합이 그들이 제시하는 민주주의 운동의 전략이다.(50)

자본과 노동이라는 특권적 적대와 노동운동이라는 특권적 운동이 사라지고, ‘등가’의 원리에 따라 모든 운동이 평등한 시민권을 획득한 민주주의.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이하고 극단적인 태도를 예상하고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제 안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앤디 워홀 말대로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만 그 평범함에 ‘세로움’의 단장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50)

 

3) 횡단과 유목: 들뢰즈와 가타리(Deleuze, Gilles & Felix Guattari)

그들은 포스트모던하다고 간주되는 새로운 현상이나 예술에 대해 어떤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으며, 별달리 그것을 다루지도 않는다.

그들이 근대성에 대한, 근대 사회와 근대적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복하려고 꿈꾸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51)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친성(벨슈)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는 근대성에 대해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재정의한다면, 이러한 흐름과 연관하여 그들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51)

그들은 푸코와 유사하게 근대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미시적 권력의 작용점을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낸다.(들뢰즈 & 가타리, [천의 고원]) 그 권력은 욕망 내지 삶의 흐름이 갖고 있는, 무엇으르도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특이성을 어떤 도식에 맞추어 통제가능한 질서로 바꾸며, 그것에 욕망이나 흐름을 고정하려 한다. 그것은 생산적인 힘(능력)과 의지(욕망)를 특정한 형태로 코드화하거나, 특정한 영역으로 영토화한다.(52) ** 욕망-탈주-횡단

*욕망은 영토화에 선행하고 거기서 벗어난다(탈주). 그것은 새로운 연구의 주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위해 기존의 분과를 가로지르면서(횡단) 새로운 연구의 영역을 창출해낸다.

이런 과정을 기존의 코드와 영토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또 다시 권력에 의해 재코드화되고 재영토화된다. 하지만 또 다시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이 시작되고…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반복적인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차이의 반복. ‘영원회귀’(52)

코드화·영토화->탈코드화·탈영토화->재코드화·재영토화->탈코드화·탈영토화->…

이처럼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을, 특정한 코드와 영토에 ‘정착’시키고 고정시키려는 권력의 지대(地帶)를 횡단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영토를 생성해낸다는 점에서 ‘유목’(nomad)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지대, 그리하여 모든 것을 고식적인 형태로 고착시키려는 지배적 경향에서 벗어나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긍정적 생성이다. 그것을 통해 권력에 길든 삶의 방식, 권력에 의해 코드화되고 영토화된 개인에서 벗어나, 횡단하며 접속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개개인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언제나 스스로를 넘어서는 사람. 그것은 각자가 ‘다른 것’이되는 것이다. 니체는 그것을 ‘넘어서는 자’-‘초인’-라고 불렀다.(53)

언제나 정착을 요구하고 언제나 정형화를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친근한 유혹을 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횡단이라는 전략이 기존의 제도화된 권력의 눈에 심히 거슬리는 위험한 발상이라면, 유목의 전략은 그 친근한 유혹을 뿌리친다는 점에서 황당하고 어이없는 발상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정착을 유혹하는 권력의 눈이다.(53)

결국 횡단과 유목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정착할 영토가 아니라 벗어날 영토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벗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이다.(53)

 

4) 아우토노미아: 네그리(Negri, Antonio)

네그리는 이탈리아의 아오토노미아 운동과 긴밀히 관련되었던 맑스주의자다.(53)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과 노동 간의 적대가 없는 것처럼 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를 신비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이 제기하는 현대 사회의 새 면모에 대해서느 적극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치학을 발전시켰다.(55)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계급 적대의 관점’: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네그리의 아우토노미아를 ‘접합’하려고 하는 라이언은 이 역시 포스트모던 정치학의 하나로 보고 있다.(라이언,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정치와 문화])(55)

사회적 공장, ‘사회적 자본’(네그리, [전복의 정치학])(55)

‘사회적 노동자’. 사회적 노동이란 다양한 소통의 연결망을 통해 하나로 결합되는 사람들의 집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착취의 영역의 확장이기 이전에, 노동이 생산적인 힘으로 전환되는 집합적 영역의 확장이고, 노동이 갖는 그 집합적 잠재력의 확장이다. 자본의 새로운 착취는 바로 이 새로운 잡재력의 착취인 것이다.(윤수종, [안또니오 네그리의 정치경제학 비판])(55-6)

공장 자동화나 소통적 노동의 새로운 집합적 단위로 인해 만들어지는 자율적이고 다양한 삶의 영역은 이렇듯 사회적 자본의 포섭과 착취로 인해 다시 단일한 적대로 환원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적대의 차원을 제거함으로써 신비화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즉 총체화되지 않는 자율성과 다양성의 가능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절대화하며, 그것을 다시금 착취의 대상으로 ‘총체화’하는 자본의 적대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56)

네그리의 전략은 각각의 집합적 노동자, 사회적 노동자가 자본의 포섭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집합적 주체로 스스로를 새로이 구성해야 하며,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작동되는 다양한 분절을 횡단하면서 서로 접속하는 것이고, 자본의 가치 증식이 아니라 집합적 주체 자신의 가치증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에 의한 노동, 화폐로 변환되는 노동의 외부에서 스스로 노동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노동이기를 그친 노동이다(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56)

그것(네그리의 전략)은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맑스주의에 대해 긋고 있는 부정의 경계선을 제거하면서, 양자의 피가 서로 섞이는 혼혈 내지 합금을 시도하는 있는 셈이다.(56)

  (2010.04.04. 04.13 보완)